1845년부터 1852년까지 8년 동안 아일랜드에서는 인구의 8분의 1에 달하는 125만 명이 굶주림으로 숨져가는 대기근이 발생했다. 서민들의 주 식량이었던 감자에 마름병이 급격히 번지면서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감자 마름병은 당시 아일랜드뿐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그런데도 유독 아일랜드에서만 대기근으로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왜일까?
이유는 바로 '정치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일랜드가 지금과 같은 민주공화국이었다면 투표권 행사를 통해 위정자들을 해고하고 서민들의 끼니 문제를 해결해줄 정치인을 다시 선출했겠지만, 정치 권력을 가지지 못한 과거 아일랜드인들은 식량을 재배분할 권한이 없었다. 지난해 방송된 EBS 다큐 '민주주의'에 소개된 내용이다.
당시 아일랜드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인 지주들은 시장 원리에 따라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영국으로 한 해 4천 척 이상의 배에 작물과 가축 등을 실어갔다.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남겨진 먹을 거라곤 감자밖에 없었지만, 감자 마름병으로 작황이 엉망이 되자 아사자가 속출한 것이다.
영국 정부마저 식민지의 비극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끼니를 이을 수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취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존 미첼은 "감자를 망친 건 물론 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건 영국인들이다"고 꼬집었다. 또 세계 각국의 심각한 기근 현상을 연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근의 정치적 책임을 정치 지도자들에게 물을 수 있기 때문에 위정자들이 기근을 막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최근 대한민국은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재벌 대 소상공인, 부자와 가난한 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사회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는 가계 부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빚'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서민들이 상당수다.
현재 우리 사회 불평등과 그로 인한 사회 갈등이 확대되고 있는 이유 역시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가졌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에 불과할 뿐, 이를 제대로 활용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고민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우선 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 챙기기에 급급해 국민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고, 살기 팍팍한 국민들은 당장의 생계를 위해 정치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극단의 이기주의로 '각자도생'에 바쁘다 보니, 주어진 민주적 권한을 이용할 줄도 몰랐고 감시도 뒷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순실로 점화된 시민들의 분노가 결국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를 탄핵하는 폭발적인 응집력을 발휘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잠재된 갈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가 말한 "민주주의는 자신들이 뽑은 통치자를 해고할 수 있는 체제"라는 명제가 2017년 이 땅에서 현실이 됐다.
이제 우리는 '촛불'로 만들어 낸 대통령 탄핵의 결과로 5월 9일 '장미 대선'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치러진다고,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대통령이 된다고 끝은 아니다. 선출된 대표자가 진정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게 할 여러 가지 제도가 얼마나 잘 만들어지고 운영되는지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시민에 의한 통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해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있어야 밝은 미래도 있다. 투표하자. 그리고 감시하자. 결국 해법은 다시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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