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이장가 후손의 그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며 중국군 장군(중장)으로 활동한 이상정(1896~1947)의 손자 이재윤(69) 씨의 독백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월세 15만원짜리 쪽방에서 힘겹게 사는 그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말이다. 이상정 장군은 저항시인 이상화의 큰형이자, 우리나라 첫 여성 비행사로 대한독립군 대령 출신인 권기옥 여사의 재혼 남편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것만으로도 집안에 대한 자긍심은 마땅하다. 할아버지가 죽은 다음 해인 1948년 태어나 얼굴조차 모르지만 자랑스럽고 그의 말처럼 충분히 어깨에 힘을 주고 지낼 만하다. 그가 할아버지 집안을 자부해도 될 일은 더 있다. 먼저 종증조부 이일우로, 증조부(이시우)의 형이다. 이일우는 바로 할아버지의 4형제(상화'상백'상오)가 세상에서 말하는 '용봉인학'(龍鳳麟鶴)의 인재가 되도록 뒷바라지한 인물이다.

그리고 고조부(이동진)가 있다. 증조부 형제(이일우'이시우)를 낳은 인물이다. 고조부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가난한 3대 독자였지만 이웃과 집안 후손들을 위해 남긴 행적 때문이다. 근검과 스스로 노력해 재산을 일궈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부(富)를 사회에 내놓았다. 나아가 '밭 260두락(마지기)과 논 994두락 가운데 밭 80두락과 논 150두락을 친지들에게 고루 나눠 주고 논 400두락은 종족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여 의식 걱정이 없도록 하면서 종족과 이웃이 함께 잘 사는 길을 열어주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조부는 힘들게 불린 재산을 이웃과 함께 후손들이 고루 혜택을 누리도록 한 셈이다. 경주 이씨로서 대구에서 '이장가'(李庄家)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여 만든 까닭은 이웃과 종족 사람들의 어울림과 나눔을 통한 '함께 잘 사는 길'을 바랐던 정신 때문임은 그와 아들 이일우를 기린 문집 '성남세고'(城南世稿)에 잘 녹아 있다.

이런 사실은 이상정 손자에게 또 다른 힘이 될 것이다. 다만 3세 때 소아마비로 오른팔과 다리를 잘 쓸 수 없어 기초생활수급자의 삶을 보낼 앞날이 안타깝다. 오죽했으면 "친일파 재산을 몰수해 독립운동가 집안에 나눠줘야 한다"고 했을까. '이장가' 개조(開祖) 이동진의 부재(不在)와 후손의 한숨에 세월이 무상(無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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