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옛 대구, 새 대구

"10여 년 전 내가 갔을 때의 대구와 오늘의 대구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대구는 면목(面目)을 일신(一新)하였다. 구대구(舊大邱)가 발달하였다기보다 구대구의 유허에 신대구(新大邱)를 건설하였다 함이 적당할 것이다."

100년 전, 작가 이광수는 1917년 8월 10일 매일신보라는 신문에 대구를 둘러본 소감으로 달라진 대구를 전했다. 그는 10년 세월 전후의 대구 두 모습을 비교했다. 대한제국 시절 대구의 옛 모습과 일제가 지배하는, 이제는 남의 땅이 된 대구의 새 모습이다. 그의 글이 실린 신문은 당시 하나뿐인 한글신문이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 일본 식민지배를 돋보이게 하려는 냄새가 잔뜩 풍기는 의도된 글임이 틀림없다.

앞서 그는 1916년 9월에도 같은 신문 22, 23일에 '대구에서'라는 제목으로 대구 젊은이와 대구를 비판했다. 특히 그해 9월 4일, 대구 여러 젊은이가 대구 부잣집(서우순)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하다 붙잡힌 '대구권총사건'을 '전율할 범죄'로 봤다. 그는 이 '강도사건'의 원인으로 젊은이의 포부와 능력을 펼 기회의 없음과 마땅히 할 일이 없음, 교육의 미비와 사회의 타락을 꼽으며 대구 사회의 책임을 따졌다.

100년 전, 식민지 수도 경성(京城)에서 뛰놀던 그와 많은 사람 눈에 대구는 분명 이상했음 직하다. 일본이 주인이 된 뒤부터 낡은 터 위에 새 도시를 세워 달라졌는데도 잃은 나라 되찾겠다며 뭇 젊은이가 권총으로 부잣집 돈을 터는 '강도사건' 같은 '전율할 범죄'나 저지르니 한심했을 만도 하다. 글 솜씨로 식민 세력에 빌붙어 편히 살 즈음, 대구 젊은이는 계속 '범죄'에 빠졌고, 대구는 그들의 독립항쟁 때문에 저항의 도시로 역사에 이름을 빛냈다.

지금, 대구가 정치적으로 구대구와 신대구의 갈림길이다. 뭇 선거에서 대구는 특정 일당(一黨)이 독식하는 '묻지마'의 낡은 옛 틀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욱 그랬다. 밖으로부터 호된 비판과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까닭이다. 말하자면 선거는 옛 대구였다. 그러나 지난해 총선에서 이런 옛 대구의 울타리는 조금 무너졌다. 대구 유권자가 30년 세월에 일궈낸 변화다.

9일 하루, 19대 대선은 옛 대구 허물을 벗을 두 번째 기회다. 100년 전, 대구 젊은이가 잃은 나라 되찾을 '범죄'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듯 오늘 대구 유권자의 '장미' 투표용지 한 장이 과연 옛 대구를 허물고 새 대구를 세울지, 저녁 개표가 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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