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족이 어우러져 살던 시절 손자, 손녀에게 할매, 할배는 각별한 존재였다. 할매 치마폭이나 할배 무릎 위는 어매(경북 북부에서 어머니를 이르는 말) 아배(경북 북부에서 아버지를 이르는 말)의 회초리로부터 자유로운 해방 공간이었으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세대 간 소통의 공간이었다. 풍상을 겪으며 평생 체득한 인생의 경험과 교훈을 조근조근 풀어내면서 손자녀의 인격 형성과 정서적인 성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교육현장이기도 했다.
경상북도가 2014년 전국 최초로 '할매할배의 날'을 제정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고령화와 가족공동체 붕괴에 따른 가족문제, 인성교육 및 노인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대응과 더불어 각종 사회문제를 가정에서 조부모를 중심으로 해결코자 한 것이다.
◆할매할배의 날, 효가 아니라 인성교육의 장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건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다. 하지만 자녀교육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없다. 재력과 권력은 노력하면 웬만큼 얻을 수 있다지만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아서다. 핵가족화된 현대사회에서 자녀교육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기는 했지만, 자녀교육에 필요한 부모로서의 준비도 부족하고 먹고사는 문제로 맞벌이하느라 여건도 받쳐주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은 조부모가 손자녀를 양육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한 세대를 건너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격대(隔代)교육'이라고 한다. 손자녀를 향한 사랑과 훈육 사이에 객관적 균형을 유지하는 사려 깊은 교육이 조부모에 의한 교육이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바람으로 아이를 감정적으로 대하기 쉬워 조부모의 절제된 너그러움과 경험적 지혜가 필요하다. 할아버지의 연륜을 바탕으로 아이는 단정한 옷차림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익힌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친밀감을 맺고 소통하는 게 이들의 인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교육부도 이 같은 조손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지난해 1월 발표한 인성교육 5개년 종합계획에 할매할배의 날을 반영했다.
경북도 노인효복지과 관계자는 "어버이날, 노인의 날은 효가 중심이다. 할매할배의 날은 효가 아니라 조손관계 회복을 통해 세대 간 소통'공감을 끌어내고, 격대교육을 통해 미래세대에게 인성교육을 하고 사회문제를 치유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며 "이런 점이 할매할배의 날과 다른 기념일의 큰 차이점이다"고 했다.
◆할매할배의 날, 왜 지금인가?
이렇게나 중요한 조손관계 회복이 우리 사회에서는 왜 이제야 이야기될까? 이는 되살려야 할 전통이기보다는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고령 인구의 빠른 증가를 특징으로 한다. 삶이 오래가는 건 축복이면서 동시에 여러 문제를 낳는다. 2015년 7월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 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3.1%이지만 2060년에는 40.1%로 높아져 세계 2위가 될 전망이다. 당연히 우리 사회는 생산력이 낮아진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빈약한 사회보장제도는 이렇게 많은 노인의 경제 여건도 사회지위도 보장해주기 어렵다. 이처럼 사회는 늙어가지만 지난해 한국의 노인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에서 1위이다. 이로 인해 노인차별, 소외, 세대 간 분리현상 등은 사회 전 분야에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노인들이 할 일은 의외로 많다. 그중 하나가 교육문제이다. 우리는 제조공장이 없어도 만들고 싶은 걸 생산할 수 있는 3D 프린팅 시대에 산다.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를 이용하는 인간의 도덕성이다. 도덕성이 없고 삶의 지혜가 부족한 채 문명이 진보하는 건 인류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이 부분에서 할매할배의 날과 같은 공동체 회복 방안은 현대사회 병폐를 치료할 수 있는 중요한 키이다. 격대교육이 일반화되면 자연스레 뒤처져 있던 노인의 위상도 올라간다. 후세대의 도덕과 인성교육에 들어가는 국가 또는 사회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고독과 무료함 등 노인이 겪는 사회문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나 해결된다. 더욱이 가정도 화목하며 건강해진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게 아니라 네 마리를 잡을 수 있는 셈이다.
윤용섭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은 자신이 공동집필한 '노인이 스승이다'라는 책에서 "노인은 지금 젊은이의 미래다. 노인이 힘차고 평안해야 청소년의 마음도 든든하고 장래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했다. 건강한 노년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들과 정서적 교감을 하고 교육받은 청소년이 많아질수록 과학기술이 고도화되고 늙어가는 우리 사회에 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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