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열남(熱南)①-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20 몇 년을 살다가 손톱과 머리카락 몇 올만 남기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막막함이…"

바렛트호 선상퇴함 훈련.
바렛트호 선상퇴함 훈련.
부산 제3부두를 떠나며.
부산 제3부두를 떠나며.

나는 1971년 10월 25일 조국을 떠나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1973년 2월 16일 철수하는 날까지 약 17개월을 월남에서 전투병으로 복무했다.

파병 전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보충교육대에서 한 달 동안 파월훈련을 받았다. 훈련 종료 직전 우리는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군번과 이름을 적은 봉투에 넣어 제출했다. 먼 이국의 전투지에서 전사할 경우를 대비하고, 또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될 때 고향의 부모형제들에게 보낼 내 신체의 일부였다.

20 몇 년을 살다가 이 세상에 손톱과 머리카락 몇 올만 남기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육친의 사랑, 동기간의 정, 친구들과 추억, 사랑했던 여인과의 애틋하고 아쉬웠던 날들이 모두 지난날 남긴 그것만이 내 생애의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엄습했다. 그럴 수는 없다. 설령 내가 먼 이국땅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이름 위에 머리카락과 손톱만 남길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동안 날마다 그날의 생활과 생각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장에서 내가 맞이했던 생각과 생활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정든 조국을 떠나는 날부터 그립고 또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던 날까지 나는 기록을 했다. 그 위험하고 어려운 작전 중에도, 정글과 늪 한가운데서도, 행여 이 기록이 젖을세라 비닐로 둘둘 말아서 보물같이 가지고 다녔다. 때로는 기지에 앉아서, 매복지에 누워서, 눅눅한 숲 속에서,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는 썼다. 나는 베트남전에서 이렇다 할 훈장을 받거나 계산 빠른 다른 이들같이 돈을 벌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날에 남긴 이 기록이 내게는 어떤 훈장보다 자랑스럽다. 한편으론 하나같이 부끄러운 기록들뿐이다. 그러나 어떠랴. 한 점 가식 없이 본 대로, 경험한 대로, 느낀 대로 기록했다. 내 능력의 한도 내에서 마음을 담아 각인처럼 새긴 실록이다.

▶출발

1971년 10월 25일 오후.

뱃고동 소리가 깊고 무거운 여운을 남기며 부산 제3부두의 하늘로 느릿느릿 올라갔다. 부두에 메아리쳐 돌아오는 뱃고동 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마음을 더욱 저리게 했다. 갑판에서 내려다보이는 부두에는 수많은 태극기가 찬란한 물결을 이루었고 교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힘찬 군가를 부르며 우리를 환송해주었다.

군대 생활을 시작하고 10개월, 입대 때부터 생각했고 여러 가지 고민과 기대 끝에, 나는 이 파병의 길을 선택했다.

배가 부두를 벗어나자 고향에서 이곳까지 달려와 준 막내 여동생과 부산에 사는 외사촌 형제들의 모습이 어느덧 부두의 인파 속에 가물거리며 사라져갔다. 배는 대해로 나오면서 점점 흔들림이 심해졌다. 선체가 흔들리면서 어지러워지고 머리가 몹시 아팠다.

내무사열을 시작하고 상관들이 정돈과 질서를 독촉하면서 쌍소리와 발악 같은 고함을 질러대며 잘못된 부분을 계속 지적하면서 자꾸만 제2, 제3의 수검준비로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밤바다의 파도도 거칠어졌다. 적어도 몇 천 명의 장병이 타고 있었기에 배에서의 배식시간은 무척 길었다.

"아침 기상과 동시에 뒤꽁무니에 줄 서서 배식을 받고 보면 어느 틈에 점심때가 되고 또 그 즉시 뒤꽁무니에 붙어서야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더라."

월남에 다녀온 고참병의 말이 실감 났다. 정말 거의 두어 시간쯤 기다린 끝에 배식을 받았다. 식단은 매우 훌륭했다. 우리 한식과 양식을 반반으로 한 고급 식사였다. 하지만 첨가된 조미료가 식성에 맞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처음 큰 바다로 나오는 배를 탄 멀미 때문인지 심한 구역질이 나서 식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바레트(Ballett)호. 3만5천 톤.

수천 명을 한꺼번에 수송하는 이 거대한 군함도 이 망망한 대해에서는 그야말로 일엽편주, 한 장의 낙엽처럼 나풀거렸다. 구토와 어지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져 결국은 그동안 먹은 전부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낙엽처럼 흔들리는 선체는 침대를 요람같이 흔들고 심한 파도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을 대각으로 세우거나 구석으로 처박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밥맛을 잃어갔다. 억지로라도 식당을 찾아 줄을 서고 밥을 받아 밥술을 들면 쌀알이 입안을 뱅뱅 도는 것 같았다. 꼭 뱃멀미만은 아닌 것 같은데도 왜 그런지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속마저 비면 항해 생활이 더욱 힘들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배식을 받으러 가지만, 줄 서는 기다림과 억지로 삼키는 식사시간은 힘겨웠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살다 보니 먹는 괴로움도 다 당해본다. 먹고 먹어도 늘 배고픈 군대 생활에서 이렇게 억지로 먹어둬야 하는 괴로움을 겪을 줄은 몰랐다.

미국 돈 달러가 나왔다. 항해수당이라고 했다. 일등병인 내게 주어진 것이 6불 75센트. 꼭 우리 돈 10원짜리를 닮은 작은 지폐가 5달러짜리라고 했다. 이 금액은 고국 군대 생활에서는 일등병인 내가 석 달이 넘는 기간을 복무해야 받을 수 있는 봉급 액수다. 먼 거리를 배 태워 실어다 주면서 항해수당이란 것을 우리에게 지불해 준다는 것이다. 일주일과 석 달여가 동일한 가치와 비중을 갖는다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10월 30일, 긴 항로 끝에 우리는 드디어 월남의 다낭 항구에 닿았다. 오전 9시쯤에는 짙게 깔렸던 안개가 걷히며 비도 멎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육지에 갑판 위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젖은 흙냄새와 푸르른 초목이 반가웠다. 모두들 아이처럼 함성을 지르고 소란을 피우며 갑판으로 몰려나왔다.

이곳은 조국으로부터 까마득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남의 나라인지라 모든 것이 생소할 줄만 알았는데 마주 보는 육지와 하늘은 그다지 낯설어 보이지가 않았다.

의외로 서늘한 바람은 우리의 가을 날씨를 닮은 것 같았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물이 반가웠지만, 짙은 숲과 흙냄새가 가장 먼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우선 해병대와 고국에서 가져온 많은 짐들을 부리고 우리가 내려야 될 캄란이라고 하는 항구까지는 아직도 하룻길이 남았다고 한다.

곧 출발해 갈 줄 알았던 배는 다낭 항에서 급유와 정비를 기다리면서 만 하루를 쉬고 간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하선해야 할 곳까지는 총 8일간의 항해가 되는 셈이다. 실로 지루하고 긴 항로였다.

부두에는 수많은 한국인 기술자들이 군용물자의 상'하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대한통운 소속 사원이라고 했다. 나도 일찍이 기술자로서 해외 진출을 꿈꾼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전국 신문사 최초로 매일신문이 제정해 운영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학상 공모전입니다. 만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공모 부문은 논픽션, 시, 수필 등 3개 부문입니다. 대상 1명 500만원, 최우수상 3명 각 300만원, 우수상 15명 각 100만원 등 총상금 4천100만원입니다. 주제에는 제한이 없으며, 매년 5월경 공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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