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같은 훈련이 끝난 것은 1971년 11월 15일.
훈련 기간은 보름에 불과했지만 마치 몇 년이나 되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의식 있고 숨을 쉬는 동안에는 촌치의 휴식도 없이 PT 체조를 해야 했고 양쪽 주먹을 땅에 대고 팔 굽혀 펴는 신체 단련을 하도 많이 해, 주먹 바깥 부분은 왕소금 같은 모래땅 덕으로 아예 피부가 굳어버렸다. 이른바 올챙이 포복이라는 특수기합은 웃통을 전부 홀딱 벗겨 두 손을 등 뒤로 몰아 쥐게 해서 발로 땅을 밀고 어깨로 땅을 받쳐 앞으로 나가는 포복으로 앞 양쪽 어깨와 팔꿈치에는 피 머금은 두툼한 딱지들을 견장처럼 달았다.
최종 특명 보직 발령은 제3대대 10중대로 났다. 멀리 캄보디아 국경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우리 10중대로 가는 인원은 20명. 더플백을 메고 정오쯤 신고를 마치고 헬기장으로 나갔다.
대형 헬기 CH-47 시누크(shinook).
완전 군장을 한 병력 30여 명을 한꺼번에 탑승시킬 수 있다는 규모로, 꼭 누에같이 생겨서 앞뒤에 양쪽 프로펠러가 달린 대형 헬리콥터였다. 버스보다도 훨씬 더 커 보이는 기다란 몸체가 뜨고 앉을 때 근처 사람들의 몸을 날려버릴 것 같은 강한 날개 바람이 휘몰아 왔다.
처음 헬기를 타보는 탓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움츠러드는 위축감과 웅장한 엔진 소리에 압도되며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 꽁무니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산야가 까맣게 발아래로 내려앉는다. 엄청난 날개 소리와 엔진 소리는 바로 옆 사람과도 전혀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뚜타거리고 있었다.
몇 피트나 올라왔을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산야의 풍경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좁고 길게 굽어 친 도로, 가늘고 하얗게 햇빛을 반사하는 강줄기, 성냥갑같이 조그맣게 보이는 집들과 마을.
40여 킬로미터. 백 리나 되는 먼 길인데, 비행시간은 고작 10여 분 정도였다. 갑자기 눈 아래서부터 불쑥 치솟아 오른 저 전초기지가 우리 10중대의 용마 기지라고 했다.
헬기는 빨간 연막탄의 유도를 받아 그물로 달고 온 물탱크를 먼저 땅에 내리고 사뿐히 착륙했다. 우리를 땅 위에 내려놓은 헬기는 몸을 날려버릴 만큼 강한 바람과 모래먼지를 뒤집어씌우고 곧바로 하늘 위로 치솟아 올라가 버렸다.
갑자기 닥치는 정적과 그 웅장한 엔진 소음의 여운이 그대로 남아, 일시적으로 청각 기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중 나온 중대원들의 환성과 박수 치는 환호 장면이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깊은 정적 속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내 최종 소속은 제3소대 1분대.
6명의 분대원이 땅굴 같은 막사에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월남으로 오는 배에서부터 긴장과 고통만을 겪어와서일까, 이들의 뜨거운 환영과 친절이 너무나 반가웠다. 진정한 포용으로 굳은 악수로 맞아주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이곳 생활은 완전한 분대 단위의 구분 막사라, 쉽게 가족적인 분위기가 될 수 있었다. 밤에는 분대 안에서 C레이션 환영 파티도 했다. 왠지 모를 따사로움과 고마운 마음이 조용히 가슴속에 퍼졌다.
▶정글 속의 연극
3-14호 작전.
내가 파월 후 처음 투입되는 전투의 이름이었다. 혼자 상상하고 꿈꿔오던 기대가 큰 첫 작전이고 규모는 우리 3대대 병력만으로 실시하는 금년 들어 14번째의 전투이므로 작전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전체 중대는 실전 참여병과 잔류병으로 구분되었다. 혹시 출동으로 비워진 우리 기지가 적의 공격을 받을 염려가 있으니 기지를 방어하고 지키는 잔류병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전 참여병은 3개 소대에서 각 23명씩 69명으로 전체 중대원 중 반수 정도가 선발되었다. 그리고 중대장을 위시한 선임하사와 중대 본부요원 6명 등 총 75명의 인원이 선발 출전하게 된다고 했다.
전투 단위는 소대별 수색, 정찰, 소탕의 개념으로, 맨 앞에는 진로를 뚫는 첨병을 선두로 탐색조와 소대장이 위치한 지휘조, 지원조, 후방 경계조 이렇게 4개조로 나누어졌다. 개념과 임무도 하나하나 구분이 되었다. 소대별 잔류병과 출전병의 선발은 소대장과 선임 하사의 재량에 맡겨진 것 같았다.
나는 파월에 대한 각오와 기대가 남달리 커서 월남 생활의 시작과 동시에 작전에 뛰어들리라, 각오를 다져왔다. 그러나 인선하던 선임하사는 나를 출전 인원에서 제외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안경을 쓴 것이 무어 그리 큰 핸디캡인가. 왠지 다부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작전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왜 나는 출전병 명단에서 빠져 있는지 선임하사에게 항의했다.
나와는 반대로 말년이 된 김 병장은 이번 작전만 빠지면 무사히 살아 귀국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수류탄을 들고 자기를 제외시켜 주지 않는다고 술기운을 빌려 위협을 하다가 김문원 중위, 그 담대한 부관에게 되잡혀 반죽음이 될 정도로 얻어맞고 얼굴이 부어 눈을 뜨지 못할 정도가 되어 몸져눕고 말았다.
남에게 뒤지지 않는 인내심을 기르고자 목숨 걸고 찾아 나선 삶의 보람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연이은 건의로 다행히도 내 뜻이 관철되어 선임하사가 이끄는 지원조의 일원으로 참전 대열에 가까스로 낄 수 있었다.
D-2일인 12월 11일 오전에는 실제 전투에 필요한 개인 군장을 갖추었다. 기본화기 M16 자동소총과 실탄 2기수 266발, 세열수류탄 두 발, 무서운 위력을 가진 클래머 지뢰 하나. 또 정글에서 식량보다 더 중요하게 생명을 지켜주는 식수는 다섯 개로 수통에 담아 묵직하게 허리띠에 달았다.
작전지역에서 방호를 구축하는 소형 야전삽 한 자루와 판초우의, 또 안전 방제가 되어줄 모래주머니 10매, 기다란 5성 타식 신호탄 한 발, 조명지뢰 두 발, 무전기용 대형 4각 배터리 하나, 그리고 가장 많은 무게를 차지하는 열일곱 끼니의 전투식량 C레이션은 재보급을 받는 날까지 6일치분을 받았다. 또 낙오를 대비한 비상식량 볶은 쌀 2일분, 바르는 기름 모기약, 말라리아 예방약, 정글에서 땀으로 배출된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정제로 만든 휴대용 소금, 이오딘 소독약 한 병, 구급용 압박붕대 등…….
지급받은 장비들을 다 꾸리고 나니까, 지고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무게였다.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맨몸으로 배낭을 질 수 없는 선두 첨병용 식량 하루분이 추가로 분배되어 짐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우리 분대 7명 중에는 3명이 남고 4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작전에 참가하는 사람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남는 사람은 왠지 미안함이 섞인 미묘한 위축감을 느끼고 있었다. 목숨을 대신 건다는 의미 때문인가.
이 밤이 지나고 내일이면 우리는 떠나야 한다. 즐거운 캠핑 짐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전쟁으로 나가는 길인 내 생애 첫 전투 참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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