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世事萬語] 보수동 책방골목

헌책방은 오래된 미래다. 과거를 품고 있지만, 미래를 지향한다.

1990년대 이전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헌책방 추억이 많다. 헌책방은 세상의 비밀을 더듬어가는 아지트이다.

헌책방은 지식의 창고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배웠다. 정지용과 백석의 시를 읊고, 이태준의 산문을 읽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다른 해석, 미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 베트남전쟁의 실상 등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함석헌, 장준하, 리영희, 김지하의 저서를 접하기도 했다.

짜릿한 재미도 있었다.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다 보면 뜻밖의 경험을 한다. 낙엽을 코팅한 책갈피, 향긋한 껌 종이를 전리품으로 얻게 된다. 부치지 못한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읽는 짜릿한 순간도 있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러운 곳이다. 골목이 문화가 되고, 오래된 일상이 소중한 자산임을 잘 보여준다. 이곳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형성됐다. 책이 귀하던 시절, 헌책을 사고파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희귀본이나 귀한 고서가 거래되기도 했다. 시국사건에 휘말린 적도 있다. 이른바 '양서조합사건'. 1978년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골목 입구 서점에 모여 '양서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좋은 책을 읽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양서조합은 불온단체로 지목됐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부림사건'으로 비화됐다. 부림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 '변호인'에 나온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국제시장 맞은편에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과 책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눈에 띈다. 골목은 아련한 추억으로 이끈다. 책방들은 오래됐으나, 단정하다. 퀴퀴한 헌책 냄새가 솔솔 풍겨 난다. 책들은 높다랗게 쌓여 있다. 1970, 80년대를 풍미한 사회과학 서적들도 있다.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활성화된 헌책방골목이다. 2012년 부산슬로시티 관광명소로 지정됐다. 2005년부터 골목 축제도 열고 있다. 부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꼭 들르는 곳이다. 주말이면 여행객들로 북적거린다. 물론 책을 사는 사람보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관광객 유치나 지역상권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부산에 보수동이 있다면, 서울에는 청계천이 있다. 지난 1~3일 '청계천헌책방거리 책 축제'가 열렸다. 서울도서관과 평화시장서점연합회가 청계천헌책방거리를 살리기 위해 2015년부터 시작한 행사다.

대구에도 헌책방들이 많았다. 시청 주변, 대구역 지하도, 남문시장 주변 등에 있었다. 지금은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생각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명물이 되고, 다른 곳에서는 퇴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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