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공산 정권에 노예 된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시대의 소음』

소련 레닌∼흐루쇼프 정권 때 정치적 소음에 피폐한 음악가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다산 책방

1936년 소비에트연방 레닌그라드 한 아파트 5층. 승강기 옆 층계참에 한 남자가 여행용 가방을 싸들고 서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잠든 집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얼굴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잠옷을 입은 채로 집에서 끌려나가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올지도 모르는 이를 기다리는 이 서른한 살 남자는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다.

'시대의 소음'은 2011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 대표 작가 줄리언 반스의 최신작이다.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재구성했다.

레닌을 지나 철권 독재자 스탈린,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한 흐루쇼프가 이어 집권한 1920~1960년대 소비에트연방을 지배한 정치적 소음이 천재 음악가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공통점은 쇼스타코비치가 '최악'이라 꼽은 시기다. 1936년, 1948년, 1960년. 12년 주기로 그의 인생을 덮친 시험의 순간에서 그는 늘 '이기는 패배'를 했다. 부끄럽게 살아남았다.

열아홉 살에 쓴 첫 교향곡은 그의 명성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놨다. 그런 그에게 찾아왔던 첫 번째 최악의 순간은 1934년 초연 이후 2년 동안 호평을 받았던 그의 두 번째 오페라 작품인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이었다. 하필이면 스탈린이 관람했던 공연에서 실수를 저질렀던 것. 스탈린'몰로토프'미코얀'즈다노프 등은 연주 중간에 자리를 떴다. 이틀 뒤 '프라우다'지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고 낙인찍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하루아침에 형식주의자가 됐다. 설상가상 자신의 후원자이던 투하쳅스키 붉은 군대의 원수(元帥)가 반스탈린 쿠데타를 주도한 혐의로 처형당하면서 그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가족에게 한밤에 들이닥칠지도 모를 내부인민위원회(NKVD)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승강기 옆에서 밤을 지새우는 모습은 극도의 불안으로 묘사됐다. 친구와 후원자가 죽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교향곡 5번을 작곡해 명예를 회복하고, 1940년 피아노 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두 번째 최악의 시기는 1948년이다. 미국 뉴욕에서 열린 문화과학 세계평화회의에 소련 대표단으로 참석했던 때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금지돼 있었지만, 소비에트 정부의 꼭두각시로서 그는 충분한 역할을 했다. 쓰지도 않은 연설문을 읽으면서 미국을 비판하고 소비에트 체제를 선전했다. 자신의 우상을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고 깎아내리고는 그날이 최악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자기혐오가 시작됐다.

마지막 굴욕은 1960년에 찾아온다. 스탈린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흐루쇼프의 임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공산당은 이 작곡가의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 작곡가 조합 의장을 억지로 맡기면서 입당을 강요했다. 사람을 죽이는 공산당원이 되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결국 볼셰비키, 그것도 최고위원이 됐다.

저자는 비겁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백하면서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복잡한 감정은 의식의 흐름에 맡겼다. 무기력하게 살아남아 정치에 예속된 음악가였지만 소극적 저항마저 게을리하진 않았다. 저자는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제5번 종결부에 알아채지 못할 항변 코드를 숨겨놨다면서 "그들은 종결부의 끽끽거리는 아이러니를, 승리의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음악이 시대의 소음에 맞설 역사의 속삭임이길 바랐던 그의 인생은 아이러니였다. 치열한 내적 갈등 끝에 자신의 음악을 배신하고, 스트라빈스키의 사진을 책상 유리에 끼워 두었으면서도 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했다면서 힐난했다.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두 종류의 작곡가가 있었다. '겁에 질린 채 살아있는 작곡가'와 '죽은 작곡가'. 그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국가 폭력에 대치했던, 그러나 살아남았던 그를 우리는 '비운의 음악가'로 기억한다.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역사의 소음 속에서 괴로워했던 예술혼에 대한 연민이 남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서전도, 회고록도 아닌 소설을 읽을 만한 이유를 쇼스타코비치의 독백으로 보여준다.

"늙어서 젊은 시절에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272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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