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유유정 옮김/문학사상사/2001)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맴은 늙도 않는데, 세월만 이자뿌고."
길을 가다가 뒤에서 들리는 난데없는 노랫소리에 돌아보았다. 화장이 땀과 뒤엉킨 두 여인의 얼굴에 주름살이 깊다. 주거니 받거니 노래 부르는 여인들의 얼굴에 노을이 물들어 꽃 같다. 잃어버린 세월의 서글픔은 노을 너머 사라진 모습이다. 앞질러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난 세월 동안 난 무엇을 상실했는가? 어느 순간부터 상실한 것을 되뇌고 사는 건 상실한 것보다 얻은 게 많은 자의 여유로운 푸념이라 생각했다. 무엇이 되었건 얻기 위해 앞만 보며 살았다. 뒤돌아 허연 내 머리카락처럼 빛바랜 책 한 권을 꺼냈다. 책장을 넘기자 후두둑 몇 장이 떨어진다. 오랜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상실의 시대' 첫 장을 펼치며 내 기억의 빗장을 열었다.
'상실의 시대'는 원제목이 '노르웨이 숲'인 일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7년 장편소설이다. 청춘들의 필독서라 할 만큼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작가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하였다. 작가의 작품 속 주제는 연인, 친구, 아내가 많다. 소설, 에세이, 논픽션 등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는 그의 작품은 세계적인 보편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 내리는 공항의 음울한 모습을 담담하게 쓴 첫 장을 읽으면 작가의 성향이 짐작된다.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이 흐르는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면 자못 자폐적인 주인공인 '나' 와타나베를 만난다. 와타나베는 열일곱, 오월에 하나뿐인 친구를 자살로 잃는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p49) 죽음에 대한 고뇌와 우울함, 상실감에 오는 고독함이 작품 속에 담담히 스며 있다.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 셋의 관계. 와타나베, 나가사와, 하쓰미 셋의 관계. 와타나베, 나오코, 레이코 셋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이 감미롭다. 관능적인 묘사가 꽤 있는데 외설스럽지가 않다. 마치 누드화를 보는 것처럼.
"반딧불이가 사라져 버린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보잘것없는 엷은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매고 있었다."(p84) "나를 기억해줘." 깊은 우물이 있는 가을 숲을 사각사각 걸으며 말하는 나오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누군가가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건 참 행복하다. 나오코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 인생이란 그런 거야."(p407)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던 기억들을 꺼내어 보았다. 지난 세월의 상실감과 회한이 불쑥 솟구치곤 하던 마음이 잠잠해진다. 아마 온전히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은 없을 것이다. 가슴에 쌓인 무겁고 아픈 과거를 덜어내고 싶은 날, 노르웨이 숲으로 천천히 걸어가 나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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