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2세인 A할머니는 하루에 7종류(당뇨'고혈압'고지혈증'방광과민'중풍 예방'치매 예방'변비) 19알의 약(藥)을 먹는다. 최근 무릎관절 수술을 받으면서부터는 약이 더 늘었다. A할머니는 아파서 약을 복용하지만 매일 한꺼번에 많은 약을 먹는 일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특히 무릎 수술 후 진통제와 위장약을 추가로 먹으면서부터는 이상한 증세가 하나 더 늘어났다.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고 기억력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이틀 동안 집에서 누워 있었던 적도 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또 다른 문제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속이 심하게 메스껍고 식욕이 뚝 떨어지면서 식사를 못하니 자연스레 기운이 떨어졌다. 집안일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치매 약이 부끄러워 자식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했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병원을 찾았을 때 담당의사가 질문을 했다. "하루에 몇 종류 약을 드세요?" A할머니는 폴리파머시(여러 종류의 약을 한꺼번에 복용하는 노인) 환자 진단을 받았다. 너무 많은 약을 먹어 합병증이 온 것이다.
◆약이 독이 될 수도 있다?
한자어인 '약'(藥)은 '치료하다' '고치다'라는 뜻과 함께 '독'이라는 뜻도 동시에 갖고 있다. 우리가 먹는 약은 검증된 독으로 병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독의 영역이 있는데 바로 그중 하나가 폴리파머시다. 매일 복용해야 하는 당뇨나 고혈압 등 대부분 지병 치료약은 임상실험을 거쳐 안전성이 검증된 상태다. 하지만 수술 후 먹는 진통제나 약 성분이 명확하지 않은 일부 약제를 동시에 먹을 경우에는 여러 약제들이 몸속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약효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알 수 없다.
폴리파머시 또한 질병 치료가 목적이기 때문에 항상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만 보통은 위험을 수반한다. 기본적으로 약은 독성을 품고 있는데 다양한 독성이 몸 안에서 충돌할 경우 체질이나 면역력과 관계없이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폴리파머시로 인한 부작용은 국내외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피츠버그대 약학대 연구팀의 '다약제로 인한 임상 결과' 논문에 따르면 폴리파머시가 늘어남에 따라 '의료비 지출 증가' '부작용' 등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이 논문은 노인의 50% 이상이 불필요한 약 1, 2종류를 복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의학전문가는 폴리파머시가 사망률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한림대학교 가정의학과 연구진이 한국가정의학회지에 발표한 '노인의 다약제 복용이 사망률에 미치는 영향' 논문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다약제를 복용한 노인의 사망 위험도가 간헐적 복용자에 비해 1.4배 높다. 특히 심장이나 뇌혈관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고혈압, 당뇨, 지질대사 이상과 같은 만성질환 환자가 다약제를 복용할 경우 더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유불급. 줄이면 고칠 수 있어
B할머니는 폴리파머시 환자였다. 하루에 10종류가 넘는 약을 먹었다. 지병 때문에 복용한 약도 있었지만 주변의 권유에 따라 먹는 건강보조식품이나 영양제도 있었다. B할머니는 관절염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졌다. 기력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갑자기 의식을 잃으면서 수차례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이 발생했다. 응급실을 다녀온 후에도 몸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많은 병이 찾아온 이유는 폴리파머시로 확인됐다. 지난해 5월 B할머니는 폴리파머시 진단을 받고 먹던 약을 줄이면서 꼭 먹여야 하는 3알만 남겨 놨다. 약을 줄이니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난 현재 B할머니는 기력이 눈에 띄게 호전돼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치료 위해선 인식개선이 가장 중요
우리나라는 건강염려증이 높은 문화적 특수성 때문에 폴리파머시 위험에 노출되기가 쉽다. 한국 노인들은 건강상태와는 상관없이 불필요한 영양제나 건강보조식품을 섭취하는 경우가 많다. '옆집 할머니가 먹으니까' '텔레비전에서 좋다고 하니까' 등의 이유로 건강한 노인도 약을 먹는다. 약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어 일단 약부터 찾아 오남용 되는 일이 빈번하다. 한국의 약값은 OECD 국가들약값 평균의 60~80% 수준이다.
전문가는 이러한 요인 때문에 국내 노인들의 약 복용실태 확인이 더욱 어렵다고 했다. 울산대 의과대 이은주 교수는 '다약제 복용과 노인에서 부적절한 약물' 논문을 통해 "한국 노인들은 여러 의사로부터 약을 처방받을 뿐만 아니라 각종 한약과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하는 경우가 많아 일일이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통상적으로 폴리파머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어떤 노인이 다질환을 겪을 경우 여러 명의 담당의사 간에 소통이 중요하다. 다자간 협의를 통해 치료방법과 약제를 처방하면 폴리파머시 문제가 줄어든다. 현재 의사가 노인에게 약을 처방할 때 일정 의약품에 대해서는 '노인주의 약물' 경고메시지가 뜬다. 하지만 처방할 수 있는 약의 종류나 개수 제한이 없다. 다약제 위험 여부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의사 개인에게 맡긴다. 의사 개인이 노인 한 사람에 대해 복용 중인 약이나 통원하고 있는 병원 전체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폴리파머시 문제는 환자들의 인식개선을 통해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익명을 요청한 지역 모 약학대학 교수는 환자들이 기본적으로 '약=독'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전했다.
독으로 병을 치료하지만 많이 먹으면 진짜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한꺼번에 많은 약을 복용할 때는 반드시 의사에게 알려야 한다.
Tip=폴리파머시 (Polyphamacy'다약제)=65세 이상 노인이 4~6종류 이상의 약제를 복용하는 것을 뜻한다. 노인들은 노화로 인한 고혈압이나 뼈 질환 등 다양한 합병증으로 한꺼번에 많은 약을 섭취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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