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서 한자어 '극'(極)은 남극, 북극, 음극, 양극처럼 자연과학에서 쓰일 때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지만 정치나 사회 분야에서 쓰일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폭정, 수탈, 광란)이 극에 달했다'는 자연스럽지만 괄호를 친 자리에 '선정, 혜택, 평화'와 같은 긍정적인 말을 넣으면 조금 어색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극'은 한쪽으로 치우침을 말하는 것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의 성인들이 경계를 했던 것이다. 치우침이 일어나는 이유는 세상을 두루 살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우(極右)나 극좌(極左)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신봉하는 것만이 절대적인 선(善)이나 정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기가 생각하는 선을 이루기 위한 길이라면 어떤 방법도 합리화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사고에 이르게 된다. 극좌나 극우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위험 요소가 된다.
치우침을 나타내는 '극'과는 달리 '중'(中)은 치우치지 않고, 알맞고 적당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알맞고 적당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실천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용'(中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은 과도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삶의 태도라고 하였다. 용기가 부족하면 비겁이 되고, 지나치면 만용이 되기 때문에 적당해야지 진정한 용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자께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자의 중용이란, 군자답게 때에 맞는 것이며, 소인의 중용이란, 소인답게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의 중용이 때에 맞는다는 것은 중용에는 절대적인 기준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기강이 흐트러졌을 때에는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용이 될 수 있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울 때는 법을 느슨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용이 된다. 똑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고 할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용기가 되지만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만용이 된다. 소인의 중용은 거리낌 없이 자기 소신을 밀어붙이는 것이므로 군자의 중용보다 멋있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위한 고민의 깊이에서는 군자의 중용을 따라가지 못한다.
얼마 전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은 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당의 지향점에 대해 극단적인 중간점이라는 '극중(極中)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실제 내용을 보면 '중도'나 '중용'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취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모순적인 '극중'(極中)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휘 선택의 차별화로 인해 중용의 길은 보이지 않고 군대에서 말하는 '중간만 하라'는 적당주의나 옛 성인이 경계했던 소인의 중용만 보인다는 것이 함정이다.대구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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