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점'으로부터

지난겨울이다. 거울이 불청객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목덜미에 난 점들이다. 몰라보게 늘어난 숫자에 흠칫 놀라 피부과로 갔다.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명실공히 미용이 주목적은 아니다. 사마귀 점이라서 번질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 방지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통증을 막아줄 마취 연고를 너무 믿었던 것은 잘못이다. 기계가 살갗에 닿자 통증의 강도가 이를 꽉 깨물 만큼이다. 10개라고 예상했던 점이 무려 스무남은 개나 제거됐기 때문이다. 인심 후한 의사선생님에게는 항의를 접고 아픈 내색도 삼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상처가 아물면 말끔히 사라질 거라 기대했던 자국이 3개월이 지난 후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작고 하찮은 점도 흔적으로 제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킨다.

미술에서 점은 조형 요소의 최소 단위이다. 하여 함부로 뺄 수 없는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그의 저서 '점선면'에서 '점'은 비물질적인 '본질'이라고 했다. 물질 개념으로 보면 제로(Null, Zero, Empty)와 같다. 이때, 제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을 때 사용된다. 점이 명사가 될 때는 '소수의 소수점을 이르는 말'이다. 그 외에도 용례는 더 있다. 의존명사로서의 점은 각종 단위의 이름이 되고, 수학에서는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 위치만 있고 크기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이야기가 지속되는 동안에 점은 중단, 부재의 상징이다. 동시에 점은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에 이르는 교량 역할을 한다.

모순된 듯해도 시선을 돌리면 전혀 엉뚱한 의미와 가치인 것이 세상에는 많다. 동음이의어인 점이 그렇다. 점은 있으면서도 없고, 출발임과 동시에 끝을 알린다. 광대한 우주에서 보면 지구도 미미한 점에 불과할 것이다. 하물며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은 오죽할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애초부터 점이었고, 현재도 점 같은 존재이다. 귀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니고 핵심이면서 주변부다. 점 같은 존재들이 한데 모여 서로 돕고 때론 다투며 사는 것이다.

모 가수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고 한 노래처럼 점은 심각한 인생사와도 맞닿는다. 필자는 지난겨울에 점을 뺐으니, '남'이 아닌 '님'이 되는 셈이다. '매일춘추'와의 인연이 그랬으면 한다. 부족한 글 솜씨이지만 귀한 지면인 만큼 차곡차곡 삶의 흔적을 담고 싶다. 음과 양이 고루 버무려진 소통의 방점을 찍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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