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小山) 박대성(73)은 수묵으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화가이다. 수묵은 지필묵(紙筆墨)으로 표현하는 세계로, 거기엔 고도의 정신세계를 기초로 한다. 폭이 몇 미터에 이르는 그의 작품은 보는 이를 압도함과 함께 현대 수묵화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겸재 정선에서 소정 변관식과 청전 이상범으로 이어지는 실경산수 계보를 잇는 한국화 거장으로 꼽힌다. 거대한 화폭에 담대한 붓질로 그린 산봉우리와 나무들, 작은 화폭에 섬세하게 그려 넣은 꽃 그림은 자연을 몸으로 호흡하며 자란 그의 관찰력과 감수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 화백은 올해 석재 서병오 문화상을 받았다. 지난 3일부터 석재상 수상 작가 전시가 열리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독학으로 그림 익혀
박 화백은 1945년 청도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한의사였던 그의 집은 살만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박 화백이 세 살 때 돌아가셨다. 이듬해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그때 박 화백도 왼손을 잃었다. 친구들이 놀렸다. 학교 가기가 싫었다. 금천중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강가에서 혼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미술을 가르쳐줄 선생이 없었다. 대신 널린 게 선생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꽃, 나무, 바윗돌이 다 그의 스승이 돼줬다. 제사 때는 지필묵으로 지방을 쓰고 사군자를 그렸다. "집안 어르신들이 소질이 있다고 했어요." 독학으로 그림을 익히던 그는 집안 어른의 소개로 열여덟 살 때 서정묵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이후 이영찬 화백과 박노수 교수(서울대)의 조언을 받으며 공부했다. 한 번은 박 교수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았다. "남의 것 흉내 내지 말고 네 화풍을 개발하라"고. 1965년 동아대 국제미술대전에서 첫 입선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면서 리얼리티 현대미술 대세 속에서도 수묵화의 위엄을 떨쳐왔다. 박 화백은 수묵화의 전통에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더했다. 어언 화업 60년. 박 화백은 "한 번도 붓을 놓지 않았는데 벌써 고희를 훌쩍 넘기고 말았네요."
◆유학, 그리고 불국사
그는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 서른 살 때 수묵화의 본고장인 중국 고미술을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 대만으로 건너갔다. 풍광 너머에 숨겨진 역사, 문화와 대화하며 자신를 단련해갔다. "전시를 했는데 평이 좋았어요." 더 머물러달라는 간청을 뿌리치고 그는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만 신문을 본 매일신문 관계자가 매일화랑 개관기념전으로 그를 초청한 것이다. "1975년으로 기억하는데, 평이 좋았어요. 매일신문 덕을 톡톡히 봤다"고 활짝 웃었다. 1988년엔 중국엘 갔다. 거기서 중국 현대 산수화의 대가 이가염을 봤다. 웅장한 구도와 힘찬 기를 내뿜는 듯한 굵직한 선에서 수묵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간략하고 대담하게 붓을 움직이지만 때로는 머리카락을 쪼개듯 섬세하게 그립니다. 거기서 제 그림을 찾은 셈이죠." 그리고 "글씨와 먹을 중요시 하라. 글과 서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는 이가염의 이야기가 귀에 쏙 들어왔다. 글을 잘 쓰면 그림도 잘 그리게 되고, 그림이 되면 글도 잘 된다는 것이다. "제가 수묵의 현대화를 위해 모델로 삼은 것은 바로 이가염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소품 위주여서, 나는 대작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94년 그는 현대미술을 탐구하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갔다. 자신이 그릴 수 있는 수묵화란 어떤 것인지, 시대를 담아낸 그림은 어때야 하는지 등에 대해 고민했다. "현대미술이 뭐냐고 물어도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현대미술의 요체가 뭔지 알고 싶었거든요." 뉴욕에서 다양한 작품을 봤다. 어느 날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현대미술이다. 그리고 최고의 도구는 필묵(筆墨)"이라고. 그는 경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보따리를 쌌다. "제가 성질이 급해요. 바로 안 하면 좀이 쑤셔 못 견디거든요." 도착한 곳은 불국사. 사정 이야기를 하고 스님에게 방을 달라고 했다. 불국사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그리고 싶은 불국사는 그려지지 않았다. 날마다 불국사를 지켜봤다. 11월 어느 날 새벽, 불국사에 눈이 내렸다. 흰눈으로 뒤덮인 불국사를 뚫어지게 지켜봤다. 그리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눈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거짓말같이 싹 녹아버렸다. 그렇게 눈 덮인 불국사를 그린 작품이 바로 세로 235㎝, 가로 756㎝ 크기의 '효설'(曉雪)이다.
◆가족 전시회 열고 싶어
박 화백은 경주에 산다. 화가인 아내와 두 딸이 있지만, 아내는 딸이 있는 서울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그는 아내 정미연 작가에 대해 "감각도 있고 재능있는 작가입니다. 화가로 생각하지 한 번도 내 수발이나 들어주는 집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혼자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혼자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기에 서로의 생활을 존중합니다."(정 작가는 현재 범어성당 드망즈갤러리에서 성화전을 열고 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쉽지 않았다. 나이 차이도 있고, 신체조건이 특별해 아내 가족이 반대했다. 정 작가는 혼인 조건으로 친정어머니를 모실 것, 평생 그림을 그리게 해줄 것, 자식을 낳지 않을 것 등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지금껏 두 가지 조건은 지켰지만 아이가 들어서면서 한 가지 조건은 깨졌어요." 첫째 딸 정련은 화가, 둘째 딸 아련과 사위는 디자인 일을 한다. 그래서 박 화백은 "언제 될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와 딸, 사위가 함께 참여하는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했다.
◆ 작가는 서파와 학파에 휩쓸리지 않아야
박 화백은 현재 경주 남산자락에 살고 있다.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찾은 곳이 바로 경주였다. 처음에는 제주나 통영도 고려했지만 경주를 택했다. "창작의 원혼이 나를 그곳으로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내게 경주는 창작의 도시 그 자체입니다. 지금도 그곳에서 자연과 인생의 문제 답을 구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했다. 박 화백은 칠순을 훌쩍 넘긴 요즘도 하루 한두 시간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워밍업입니다. 서법을 익혀야 그림이 가능하거든요. 그림은 붓을 어떻게 운용, 장악하는가에 달렸어요. 붓을 장악하자면 서법을 먼저 익혀야지요." 박 화백은 작가는 서파와 학파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작가는 파(派)가 없어야 하고, 취미도 없어야 합니다. 본업에 해가 돼요. 저는 그림 그리기가 유일한 취미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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