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니라" 법정 스님 미지막 말…『간다, 봐라』

강원도 산중 수행 사유노트, 메모·에세이 등 미발표 원고

법정 스님은 틀에 매이지 않는 행보로 종교, 사상의 벽을 허문 지도자였다. 사진은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이 스님에게 보낸 육필 편지. 김영사 제공
법정 스님은 틀에 매이지 않는 행보로 종교, 사상의 벽을 허문 지도자였다. 사진은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이 스님에게 보낸 육필 편지. 김영사 제공

간다, 봐라/ 법정 스님, 리경 엮음/ 김영사 펴냄

법정 스님 입적 8년을 맞아 스님의 생전 사유노트와 미발표 원고를 담은 책이 발간됐다.

사색 메모, 육필 원고부터 지인들과의 일화와 주고받은 편지, 그림들이 담겨 있다. 특히 임종 직전에 남기는 말인 '임종게'(臨終偈)가 처음으로 공개돼 죽음을 앞둔 스님의 생사관을 엿볼 수 있다. 유언(임종게)을 남기라는 상좌의 요청에 스님은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니라. 간다, 봐라"라고 답하고 있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얽매이지 않는 본연 그대로의 삶과 진정한 자유를 향한 의지를 잊지 않았다.

스님이 생애 마지막 시기를 보낸 강원도 산골에서 남긴 노트, 메모, 편지, 그림들이 요행히 훼손되지 않고 이렇게 깜짝 등장해 추모 열기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스님의 족적과 향기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미발표 시, 에세이, 육필 일기 새로 공개

법정 스님은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강원도 오대산 자락에서 보냈다. 화전민이 살던 집을 둥지 삼아 틈틈이 세상을 향해 글과 그림을 남겼다.

이 책에 소개된 글들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가르침을 주었던 육필 메모와 노트를 여덟 가지 주제로 엮은 것이다.

산중 수행자의 생활을 진솔하게 담은 원고들은 산거(山居) 일기를 비롯 자연과 생명, 침묵과 말, 명상, 무소유, 사랑과 섬김이라는 주제로 다시 모였다. 글과 메모들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원고였던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얻어 되살아났다.

스님이 아껴둔 미발표 시와 에세이, 퇴고(推敲)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고, 책에서 귀한 구절만을 뽑아서 정리한 내용들, 그리고 여기에 스님의 치열한 공부와 빛나는 감성이 덧붙여지면서 여운이 깊은 색다른 잠언집이 만들어졌다.

김수환 추기경, 장익 주교, 함석헌 선생, 향봉 스님, 구산 스님 등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지인들이 간직했던 스님과의 주요한 일화들도 같이 모아 부록으로 엮었다.

◆'간다, 봐라' 간명한 화두로 생사관 설파

무소유를 설파하며 시대의 스승으로 불려 온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마지막 말은 간명했다. '간다, 봐라'. 스님은 죽음의 필연성과 생사 업멸의 순환성을 단 네 글자로 녹여냈다.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명징한 글만큼이나 깊은 울림을 주는 여러 작품들은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한 보살 부부 덕분에 처음 빛을 보게 됐다. 이 부부는 신분 공개를 원치 않는 까닭에 필명 '리경'으로 책을 엮어냈다. 리경 부부는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스님의 수양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화전민이 살던 오두막을 마련했다.

몇 년 후 부부와 함께 움막을 구경하러 왔던 스님은 "이 오두막은 부처님께서 내 말년을 위해 감추어 놓은 회향처"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부부는 그 자리에서 스님에게 오두막을 시주했고, 이곳이 바로 스님이 1992년부터 기거하며 정진한 오대산의 '수류산방'이다. 부부는 이를 계기로 스님이 입적하는 순간까지 곁을 지키며 각별한 인연을 유지했다.

이 책이 출판되게 된 사연도 여기서 출발한다. 산방에서 스님은 원고들을 수시로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썼는데 부부가 이 원고들을 간직하기를 원하자 스님께서 원고뭉치들을 보내오면서 이 책의 행간과 단락을 메우게 됐다.

◆유신 독재 항거했던 '참여시' 최초 공개

8개 테마로 나눠진 책의 분류 중 눈길을 끄는 파트가 있다. 8장의 '길을 가르킨 손가락'이다. '쿨룩 쿨룩' '1974년의 인사말' '어떤 몰지각자의 노래' 세 편으로 구성된 장(章)에는 스님의 최초 저항시가 수록돼 있다.

혈기 방장했던 시절 일찍이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스님은 수행만 하는 출가자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지식인, 종교인을 구금하고 탄압할 때 세상을 향해 '큰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스님은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다가 체포, 수감돼 계엄법정에서 15년 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스님의 이런 이력은 그동안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그 흔적인 참여시가 이번에 최초로 발견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입 가지고 말도 좀 나누면서 살자고/ 우리 모두/ 허리 펴고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역사의 기록에서 길을 가리킨 그 손가락이 죄란 말인가'- '어떤 몰지각자의 노래' 라고 외치며 정권에 맞섰다.

스님은 또 파격적인 행보로 종교계 벽을 허문 지도자였다. 1997년 길상사를 개원할 때 천주교신자에게 관음보살상 조각을 부탁했고,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특별강론을 하기도 했다. 이 책 부록엔 당시 특강에 감사하는 김 추기경의 감사편지(사진)가 수록돼 있다. 그동안 유품 속에 흩어져 있다가 리경 부부가 찾아내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스님은 산중의 냉철한 수행자이면서도 세상과의 뜨거운 대화를 놓치지 않았고, 누구보다 철저했지만 늘 따뜻한 유머를 잃지 않았다. 스님의 소중한 산거(山居) 일기와 침묵, 말, 자연, 생명의 편린들을 따라가다 보면 8년 세월을 뛰어넘어 깊은 울림과 마주하게 된다. 277쪽, 1만4천500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