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체제는 스스로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은 김정은에게 비핵화의 대가로 '체제 보장'과 '경제 성장'을 제시한다. 김정은 체제를 물리적으로 무너뜨리지 않겠으며, 빈곤 탈출을 돕겠다는 것이다. 인민을 굶기는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전자가 '군사적 체제 보장'이라면 후자는 '경제적 체제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비핵화'를 수용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체제 보장'은 떨치기 힘든 유혹임은 분명하다. "이밥(쌀밥)에 고깃국"과 "비단옷에 기와집"이라는 선대(先代)의 약속이 약속으로만 존재하는 현실에서 '경제적 체제 보장'은 특히 그럴 것이다.

그 방안으로 미국이 들고나온 것이 '북한판 마셜플랜'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 재건을 위해 1948∼1951년 서유럽 16개국에 130억달러(현재 가치로 5천800억달러)를 쏟아부었던 '유럽부흥계획'과 같은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재정이 투입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그 의도는 같다.

문제는 '북한판 마셜플랜'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냐이다. 물론 '완전한 비핵화'의 실현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그 답을 알려면 '마셜플랜'이 왜 성공했는지 봐야 한다. 마셜플랜의 성과는 눈부시다. 1947∼1951년 서유럽의 통합 국민총생산(GNP)은 30% 이상 증가했다. 산업 생산은 전쟁 전인 1938년보다 41% 증가해 목표치 30%를 초과했다. 서유럽의 경제는 전쟁 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서독은 발군(拔群)이었다. 1940∼1959년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 서유럽 주요 8개국 중 서독의 1인당 GNP 평균 성장률은 6.3%로 가장 높았다. 놀라운 것은 서독이 받은 지원금이 영국과 프랑스의 절반 정도였는데도 이런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미국의 달러가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마셜플랜이 시작된 1948년 서독의 불변가격 기준 자본스톡 즉 생산 능력은 전시 파괴에도 전쟁 전인 1936년보다 10% 높은 수준이었다. 양질의 노동력도 풍부했다. 나치 지배하에서 일부가 해외로 빠져나갔지만, 과학기술 인력 대부분은 독일에 남아 있었다. 여기에 동독에서 탈출한 고급 인력도 가세했다. 원조보다 독일 본래의 잠재력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얘기다.('경제사 산책', 양동휴)

더 근본적으로는 확고한 시장경제 체제였다는 사실이다. 서독의 첫 경제장관 에르하르트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정부의 개입과 감독을 허용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체제였다. 이 중 어느 것도 북한에는 없다. 무엇보다 시장경제가 아니다.

'북한판 마셜플랜'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비핵화의 대가로 김정은이 내밀 청구서가 2천1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은 자국민의 세금은 쓰지 않겠다고 했으니, 얼마가 됐든 남한 국민이 그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 남한 납세자가 지갑을 열려 할지도 의문이지만 더 근본적 문제는 그렇게 해서라도 '북한판 마셜플랜'이 성공할 것이냐이다. 북한의 체제 변화가 없이는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의 원조가 한국 등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저개발국을 빈곤에서 구해내지 못한 실패가 보여주듯이 경제는 돈만 쏟아붓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결국 '경제적 체제 보장'은 누가 해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보장하는 것이다. '북한판 마셜플랜'이 장밋빛 허구로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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