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풍죽(風竹)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은 세종대왕의 고손자로 태어난 왕실 출신 문인화가이자 한국 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이정의 묵죽화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히는 최고의 작품으로 탄은 묵죽화의 특징들이 원숙하게 베풀어져 있어 노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거친 바위 틈에 뿌리 내린 대나무 네 그루가 휘몰아치는 강풍에 맞서고 있다. 뒤쪽 세 그루의 대는 이내 찢겨 나갈 듯 요동치지만, 전면 중심에 자리한 대나무는 댓잎만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가 탄력 있게 휘어지며 바람에 당당히 맞서고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그림자처럼 옅은 먹으로 처리한 뒤편의 대나무들의 모습을 통해 바람의 거센 강도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들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다. 바위나 흙의 간결한 묘사는 다소 투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대나무에 시선을 모아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배려이다.
정중동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화폭 전체에서 숨이 멎을 듯한 엄정함과 강렬함이 감돌고, 쉽사리 다가서기 어려운 일종의 경외심이 느껴진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조선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 본래의 의미와 미감을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군자 그림 중에서 단 하나의 작품을 선택하라고 하면 이 '풍죽'은 당연히 그 첫째 자리에 놓여야 한다.
탄은이 이와 같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천부의 자질과 부단한 수련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왕손이자 선비로서 흐트러짐 없이 격변의 시대를 당당하게 살았던 그의 올곧은 삶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 나갈 만한 시련을 당했음에도 탄은은 이를 극복하고 더욱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이런 탄은의 이력을 감안하면 이 '풍죽'에 흐르는 고고함과 강인함은 단순히 붓끝의 기교로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세현(간송미술문화재단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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