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1일 영일군 포항면 여천장날(현재 포항 죽도시장 인근). "대한 독립 만세!" 외침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다. 하나의 소리는 수백 명의 목소리로 번졌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벽보를 품에 숨긴 채 때를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어린 학생과 노인까지 구분이 없었다. 외침은 여천장터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이들은 행진하는 동안 벽보를 보이는 곳마다 붙였다. 전날인 3월 10일 북본동(현재 중앙동) 예수교 포항교회(현재 포항제일교회)가 세운 영흥학교(현재 포항영흥초교) 학생 60여 명이 교내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소식이 이곳에서 퍼지면서 만세 소리는 갈수록 높아졌다.
이 시기 서울과 대구에서 3·1 만세 운동이 잇따르면서 일본 군경의 감시가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더욱이 포항 만세 운동 계획을 주도했던 인물 4명이 결행 당일 체포되는 등 공포와 긴장감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제의 총과 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수㎞를 행진했다. 낮 동안 진행된 이 행진은 무장한 일본 군경이 출동해 강제 해산시키기 전까지 수 시간 동안 계속됐다.
일제의 진압에 해산한 것처럼 보였던 이들의 만세 운동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2일 저녁 포항교회에 다시 모였다. 어두운 밤을 횃불로 밝히며 다시 시내로 달려가 "만세"를 외치며 수㎞를 걷고 또 걸었다.
이들이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왔을 땐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이 운집한 장소는 당시 포항교회 내에 있던 영흥학교였다. 이날 이곳은 포항 3·1운동 진원지로 역사에 크게 이름을 새겼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영일·포항지역에서 진행된 3·1운동은 모두 9회, 2천900여 명이 참가했다. 횟수가 거듭하는 동안 40여 명이 숨지고, 380여 명이 다쳤다. 320여 명이 일본 군경에 잡혀 고초를 당했다. 이 중에는 어린이들도 어른들의 만세 운동을 흉내 내며 '만세놀이'를 했다는 '3·1 만세촌' 송라면 대전리의 청하장터 3·1 운동도 포함돼 있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이어진 3·1운동
영흥학교 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은 대구 3·1운동이 있은 지 불과 3일 만이었다. 본격적인 포항 3·1운동은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이 운동은 대구 3·1운동에 참가했던 최경성(당시 36세)과 송문수(당시 37세)가 이끌었다.
최경성은 1883년 1월 대구에서 태어나 1905년 22세의 나이로 포항으로 이사했으며, 포항교회를 다니며 문맹퇴치 목적으로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송문수는 1882년 11월 영일군 포항면 남빈동에서 태어났다. 포항교회를 다녔고, 1913년 대구성경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남성정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화 선교사가 설립했는데, 포항교회 역시 안의화 선교사가 1905년 개척한 곳이다. 이만집 목사에겐 3·1운동을 확산시킬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적임자는 같은 계파 포항교회에서 나타났다. 최경성과 송문수였다.
이만집 목사 등의 설득으로 대구 3·1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최경성과 송문수는 잡화상으로 변장해 대구 큰장터(서문시장) 강 씨 소금집 앞 빈터로 갔다. 여기에는 영일군 청하장터 3·1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포항 송라면 조사리교회 허담 목사(당시 33세)와 그의 조카 허방(당시 21세), 장해동(당시 19세) 등도 있었다.
대구 3·1운동 당시 일제 군경의 잔혹한 진압에 이들 중 송문수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무사히 몸을 피한 송문수는 하루가 걸려 포항으로 넘어왔다. 포항에는 그를 기다리던 청년들이 있었다. 이기춘(당시 20세), 이봉학(당시 24세), 장운환(당시 32세) 등 3명은 인적이 없는 곳에서 송문수가 전하는 말을 들었다. 이봉학과 장운환은 영흥학교 교사였고, 이기춘은 학교장의 사위였다.
송문수는 "(애국지사들이)조선의 독립을 계획하고 현재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제출하려고 고종황제로부터 날인을 받으려 했지만 이완용이 거절했다. 그 후 왕은 누군가에게 암살됐다"며 "이런 내용의 서면을 작성해 예수교 날인을 받아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결과, 회의에서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독립을 허용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들에게 말했다.
이들은 3·1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히며 함께할 사람들을 모집, 대구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벽보를 만들고 시위 때 군중에게 나눠 줄 선전문도 인쇄했다. 그러나 포항 3·1운동이 계획된 3월 11일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관헌에 송문수 등 4명이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상 대구 3·1 운동이 계획되던 3월 4일쯤부터 은밀하게 준비된 포항 3·1운동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됐지만, 시민들은 굴하지 않는 용기로 여천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지켜 들었다.

◆조선총독부에 비수 꽂은 포항 3·1운동
포항 곳곳에서 3·1운동이 진행될 당시 포항은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해 조선총독부의 감시가 극심했다. 이 시기 포항면 인구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4.35%로 기록돼 있을 정도다. 일본인들은 수산업, 상업, 금융업 등에서 일하며 포항의 경제, 정치, 기관 등을 장악해 부를 쌓았다.
총독부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1910년 포항헌병분견소를 설치한 데 이어, 1914년에는 이를 대구헌병대 소속 포항헌병분대로 승격시켜 영일군과 영덕군, 경주군, 울릉군을 관할에 두고 민족운동 등을 감시하도록 했다. 특히 포항은 총독부가 1917년 제령 제1호로 공포한 '면제(面制)'에 의해 '포항지정면'이 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지정면(指定面)이란 총독부가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특별 예산을 지급하는 모범 읍면 보조제도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3·1운동이 확산하자 총독부는 포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하려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럼에도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있었던 본정(현재 상원동)이 가까운 곳에서 3·1운동이 시작돼 주변으로 확산했다는 점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포항의 독립운동사'를 대표 집필한 이상준 향토사학자는 "사실상 일본인들이 포항의 경제계와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포항·영일 사람들은 당당하게 일제에 맞서 3·1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포항사람만의 강인한 독립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이 같은 일 군경의 삼엄한 경계와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했다.
※참고자료: (사)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포항의 독립운동사,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포항제일교회100년사 사료편찬 위원회 포항제일교회 100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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