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난 후였다. 퇴근해 방문을 여는데 친정에서 돌아온 아내가 잔뜩 화난 얼굴로 따졌다.
"당신 내 목걸이, 반지 어떻게 했어요." 나는 당황했다. 이렇게 빨리 아내가 눈치 채리라는 생각을 못 했다. 추궁에 대한 대답을 준비 못 한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내가 넋두리 한 말에 꼬투리를 잡아 수세에서 벗어나 보려고 아내보다 훨씬 높은 톤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나를 향한 질책이었지만 아내의 가슴 화덕에 기름을 붓은 격이었다. 한바탕 큰 전쟁을 치렀다. 그날 밤 아내도 나도 잠을 못 이루긴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우리 부부간에 크고 작은 갈등 요인이 생길 때마다 그 일이 주메뉴로 등장했다. 나는 아내의 가슴속에 고인 탁수를 하루빨리 맑은 샘물로 채워지길 갈망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인 돈은 생채기를 키우는 일에만 끼어들었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시집의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녹 쓸고 휘어져 고철이 된 내 마음을 야심한 밤 까만 용광로에 넣어 담금질하고 담금질했지만, 현실의 벽에 나의 철은 쉽게 휘어져 아내와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런 와중에도 날짜는 어김없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패물을 찾아야 할 날짜가 다가왔다. 때맞추어 동생의 편지도 받았다. 동생은 등록 마감일이 언제라며 편지 끝에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진퇴양난이었다. 생활이 비슷한 직장동료들의 돈을 융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나는 패물도 찾지 못하고 동생에게 입대를 제안했다. 그러면서 약속을 했다.
"삼 년 군 복무를 하는 동안 등록금을 저축해 놓겠다고,……" 매월 얼마씩 저축하면 계산적으론 가능할 것 같았다. 동생이 입대하는 날 나와 동생은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돌아서 먼 산을 바라다봤다.
앞의 기억 영상이 언덕길이었다면 다음 영상은 숨을 턱에 걸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험하고도 험한 바윗길이었다.
1975년 시월이었다. 나는 근무지를 울산시 언양면에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으로 이동했다. 산골이라 쉽게 집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 백일을 갓 넘긴 아이와 산후조리가 부실한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향했다. 생각과는 달리 어렵사리 농가의 문간방 하나를 구했다. 시월 중순인데도 대관령 산골의 밤은 남쪽에서 듣고 온 것보다 훨씬 추웠다. 낮 기온은 15도까지 올라갔지만, 밤 기온은 영하 3도까지 내려갔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해 보온이 부실한 농가 문간방은 어른인 나도 밤을 견디기에 고역이었다.
아이가 이틀째부터 기침을 시작했다. 진부면에는 병원이 없었다. 약방에서 약을 사 먹였지만, 기침은 점점 심해갔다. 코일형의 전기난로를 샀다. 밤낮없이 아이의 곁에 난롯불이 켜져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의 고열과 기침 때문에 아내와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우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틀에 한 번씩 병원이 있는 강릉을 오가기로 했다. 두 시간에 한 번 있는 급행 버스는 비포장과 포장도로를 번갈아 운행 편도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버스가 진부에서 대관령 고갯길을 오르는 비포장도로에서 뽀얀 먼지를 길게 달면 의자 밑에선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따금 머리가 버스 천장에 닿도록 엉덩방아를 찍기도 했다. 병원 갔다 온 날 밤엔 아이는 기침을 더 심하게 하고 산후조리가 부실한 아내는 칠월 가뭄의 수숫대처럼 축 늘어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네 번째 병원에 가는 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침에 밥 한술도 뜨지 않던 아내 얼굴이 떠올라 불안감을 더해주었다. 점심때 회사로 전화가 왔다.
"폐렴이 너무 심해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아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나를 긴장시켰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나를 고문했다. 쫓기는 사람처럼 서성거리며 분침과 시침에 눈총을 수없이 쏘았지만 시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걸음만 걷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병원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나는 택시를 탔다. 이 층 병실 문을 밀고 아내 얼굴부터 살폈다. 눈이 충혈 되어있다. 평소 약한 아내의 몸이 요 며칠 동안 더 수축해져 울먹이는 어깨가 겨울 찬바람에 움츠리는 갈대처럼 가늘게 흔들렸다. 병상으로 다가가 아이를 내려다봤다. 얼굴은 창백하고 작은 손등에 무거운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아무것도 안 먹었지?" 짬뽕 두 그릇을 시켜 아이의 병상 침대 아래에 펼쳤지만 둘 다 절반도 못 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우리들의 병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난 병원에서 씻고, 자고, 먹으며 왕복 세 시간이나 걸리는 시외버스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입원 팔 일째 아이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퇴원을 요청했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딱한 처지를 설명하며 간청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의사는 조건을 달았다. 일주일은 매일 병원에 와서 주사도 맞고 약도 타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 여인숙에서 일주일을 버티기로 했다. 여인숙 방은 좁긴 해도 우리들만의 공간에다 따뜻한 방바닥에 등도 녹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병원비를 아낄 수 있어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일어나 습관대로 화장실을 찾았다. 여인숙 대문 옆 허름한 창고 앞에 두 사람이 쌍을 찡그리고 서 있었다. 난 직감적으로 그곳이 공동 화장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털컥 겁이 났다. '이 전쟁에 끼어들면 영락없이 지각할 수밖에 없겠구나!' 난 그날부터 터미널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여인숙 생활 엿새가 지나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출근 버스에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비는, 아이의 분윳값은, 그리고 이 지루한 생활은 언제쯤 끝나게 될지 캄캄한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퇴근길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여인숙 방문을 열었다. 아내가 오랜만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내일부터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단다. '이렇게 기쁠 수가!' 우리는 그날 직장 동료에게서 빌린 돈으로 순대도 사고 아이의 분유도 두통이나 샀다.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았다. 오랜만에 입맛이 돌아온 나는 젓가락질에 열중하며 아내를 건너다봤다. 아내는 몇 숟가락 떠다말고 수저를 놓으며 트림을 계속했다.
다음날, 새벽같이 우린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일요일이었다. 보름 동안 비워둔 집은 엉망이었다. 종일 청소에 매달렸다. 아이도 쌕쌕거리며 잠을 자고 간만에 집사람이 해주는 하얀 쌀밥에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젠 살 것 같았다. 이것이 사는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집사람은 저녁밥을 몇 술 뜨지 못했다. 난 머릿속이 복잡했다. 보름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마음고생이 심해서일까, 아니면 어디가 큰 탈이라도 났단 말인가?
"당신 소화제 사 올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겨울 동 잠바를 걸치고 면 소재지로 뛰었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십일월의 강원도 산간 밤바람은 상상 그 이상으로 차가웠다. 약방에서 활명수 한 병과 소화제 몇 알을 사서 약방문을 나서다 옆 가게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찐빵에 눈이 갔다. 나는 집사람에게 새로운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빵 두 개를 샀다. 활명수와 소화제 그리고 가슴에 품고 온 빵을 권했다. 아내는 빵 한 개를 다 먹지 못하고 연신 하품을 하다 스러질 듯 자리에 누웠다. 측은한 마음에 나도 누워 집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전에 없이 손이 차가웠다. 종일 추위에 일해서인가보다 생각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