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소나기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연일 폭염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땀에 젖습니다. 가로수도 지쳤는지 잎사귀가 죄다 늘어집니다. 살수차가 도로에 연신 물을 뿌려 대지만 달아오른 지열을 식히기엔 역부족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얼굴이 빨갛습니다. 찬물 샤워를 하고, 얼음과자를 먹고, 냉방기 바람을 쐰 후에야 살 것 같다 합니다. 이럴 때 소나기라도 한차례 쏟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나기를 기다리는 것 비단 저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테지요.

소나기는 언제나 반가운 존재였습니다. 바싹 마른 황톳길 위로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면 풀숲에서 메뚜기도, 개구리도 놀라 팔딱팔딱 뛰어나왔습니다. 개미의 행렬은 아수라장이 되지만 금방 대열을 가다듬습니다. 잠자리들은 젖은 날개가 무거워 옥수수 대궁이든 빨랫줄이든 몸을 내립니다. 강가에서 풀을 뜯던 소들은 그 먼 길을 더듬어 혼자 집을 찾아오곤 했지요.

"비 온데이, 빨래 걷어래이." 이웃집 상 할머니의 목소리가 소나기만큼 다급합니다. 어린 나는 잽싸게 빨래를 걷고, 농기구도 처마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 소나기가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합니다.

학교가 파할 무렵 언니와 오빠를 마중하기 위해 주섬주섬 우산을 챙깁니다. 잠을 자는 동생을 두고 갈 수 없어 깨웁니다. 나는 커다란 우산을 활짝 펼칩니다. 꿈을 찾아 떠나는 만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는 비장한 모습으로 삽짝을 나섭니다. 후드득후드득~.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겁나게 좋습니다.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데려가 줄 것만 같습니다. 점점 거세지는 비바람에 우산이 사방으로 흔들립니다. 우리는 더 세게 우산대를 움켜잡고 고인 물을 첨벙첨벙 튀기며 걷습니다. 세찬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때로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리지요. 옷이 젖을까 조심하다가 옷이 다 젖은 걸 안 후에는 슬그머니 우산을 접습니다. 그리고는 마구 빗속을 뛰어다닙니다.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유! 비를 흠뻑 맞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누릴 수 최대한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죠. 흠뻑 젖을 수 있는 권리를 알게 된 건 내 나이 불과 일곱 살이었습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젖을 수 있는 자유가 그립습니다. 천진하게 자유를 누리던 소나기는 언제쯤 내릴까요? 폭염 이어지는 삶의 길에서 소나기 다시 한 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마흔을 넘긴 동생을 불러다 마음껏 빗속을 뛰어다니고 싶습니다.
살면서 소나기를 만난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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