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흔들리는 양심

애매한 낱말에 의한 오류(Equivocation)은 논리학이 다루는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Logical Fallacies) 가운데 하나다. 동음이의어를 엉뚱한 맥락에서 사용함으로써 빠지게 되는 오류를 말하는데, 예를 들면 "청춘의 큰 꿈을 품기 위해서 잠을 자야지!"같은 말이 있겠다. 꿈이 생리적 현상을 뜻하는 한편, 포부와 희망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 착안한 말장난이다. 이 오류가 우스개에 쓰이면 꽤나 효과적이지만, 진지한 토론의 장에 끼어들면 난처한 상황이 발생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을 둘러싼 논쟁이 딱 그런 경우다.

혹자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만 들어도 벌컥 화를 낸다. "남들 다가는 군대를 안가겠다는 게 어떻게 양심적일 수 있는가?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양심도 없는 것인가!"하는 식이다. 꽃다운 젊음을 뒤로 하고 속절없이 병역에 응해야 했던 대다수 남성들의 체험은 병역거부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사람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 따위의 자조 섞인 농담이 돌던 기억도 오래지 않다. 아직 냉전적 대치 상태에 있는 남북관계를 보더라도 병역 거부는 국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몰염치로 간주될 만하다. 그런 판에 '양심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붙일 수 있겠느냐고 따지는 정서가 잘못된 것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제법상으로 확립된 '양심적 병역 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라는 표현에서 채용하고 있는 '양심'(Conscience)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양심'과는 거리가 먼 법률 용어이다. 헌법재판소가 정의하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2002헌가1)을 뜻하는 바, 이는 '선한 마음'을 뜻하는 일상의 양심과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의 윤리적 실천은 관습이나 법과 같은 외적인 규범을 강제하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고 내적이고 주관적인 윤리 판단과 의지가 작동해야만 가능하다. 양심은 그런 면에서 인간의 윤리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범주에 속하고, 이는 정치나 국가권력 같은 외력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을 우선적인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문명국가의 공통된 입장이다. 로마제국의 군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포기하고 참수형을 감수한 성 막시밀리아누스(3세기)로부터 나치 독일의 군인으로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복자 프란츠 예거슈테터(+1943)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숱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도 양심의 자유를 확립시키려는 문명사의 발자취를 드러내는 것이다.

대법원이 11월 1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하므로 형사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이후, 대체 복무제를 마련하려는 활동과 더불어 대법원 판결에 불만을 터뜨리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나의 정책이나 판결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는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법률용어가 왜 나오게 되었으며, 그것이 국제적으로 확립된 용어임을 알만한 식자층에서까지 '군대 안가면 양심이 없다는 말이냐'식의 빈정거림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그가 또 다른 의미의 '양심', 즉 '선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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