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고구마
줄밤다리 황토밭에서 캐온 고구마가 마당에 그득했다. 아버지는 지게를 메고 산비탈 돌밭을 십여 차례나 오르셨다. 바지게에 고구마를 가득 담고, 그 위에 고구마 줄기를 덮어서 비탈진 산길을 조심조심 내려오셨다. 갓 캐온 고구마는 일단 할머니의 손길을 거쳐 갔다. 마당에서 흙을 털어야 하고 습기도 말려야 했다. 고구마는 크기별로 구분했다. 호미에 찍힌 것이나 자잘한 것은 따로 보관하였다. 소여물에 넣기도 하고 돼지죽 끓이는 데 사용했다.
안방과 사랑방 윗목에 수숫대로 엮은 발을 두르고 그 안에 고구마를 쟁였다. 고구마는 천정에 닿을 정도로 가득했다. 겨우내 먹을 주전부리 대부분을 차지한 고구마와 겨울 한 철 동안은 한방에서 기거했다.
아버지는 쇠죽 솥 아궁이의 장작불이 잦아들면 고구마를 구워주었다. 겉은 숱처럼 까맣게 탔으나 속살은 노란 군고구마, 입술에 숯검정을 묻혀가며 달게 먹었다. 할머니는 긴긴 겨울밤 옛날이야기 두어 자락을 마치면 화롯불에 묻어둔 고구마 껍질을 까주었다. 엄마는 저녁마다 고구마를 삶아 함지박에 담아 방문 앞에 갖다 두었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문밖의 함지박을 들여놓고 아랫목에 모여앉아 고구마를 먹었다. 반짇고리를 앞에 두고 바느질을 하던 엄마는 동치미 국물을 떠다 주었다. 얼음이 서린 동치미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밤새 영하의 기온으로 차가워진 고구마와 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도 감기를 모르고 자랐다. 달게 먹은 음식은 아마도 약이 되었나 보다.
줄밤다리 밭에서 캐온 고구마는 달콤했다. 다른 집에는 대체로 밤고구마였지만 우리 집 고구마는 물기가 많아 '물고구마'라고 불렀다. 낮이고 밤이고 고구마를 그렇게 먹었건만 어떻게 질리지도 않았을까. 겨울 한 철이 지나면 그 많던 고구마도 동이 났다. 알 굵은 고구마 한 소쿠리는 따로 보관하여 아버지의 손을 거쳤다. 사랑방 윗목에 송판으로 경계를 지어 비닐을 깔고, 부드러운 모래로 채운 후 고구마를 심었다. 아버지는 고구마 싹을 틔워 또 한 해의 농사 준비했다.
고구마는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고 전한다. 대마도에서 종자를 얻어와 재배했으며 일본말 '고귀위마古貴爲麻'에서 유래되어 '고구마'로 부르고 있다. 흉년과 전쟁으로 먹을 것이 귀하던 때에 고구마는 구황작물이었다. 지금은 먹을 것이 풍부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고구마를 간식과 건강식으로 이용한다. 고구마는 식이섬유가 많아 다이어트에 좋을 뿐만 아니라, 종류에 따라 영양가와 효능을 발휘한다. 밤고구마는 칼륨이 많아 혈압 조절에, 호박고구마는 베타카로틴 성분이 있어 항암식품으로, 자색 고구마는 노화 억제물질을 함유하고 있다니 참으로 고마운 식품이 아닌가. 껍질째 먹어야 그 효능이 더 좋다고 한다. 요리할 때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오븐에 고구마를 구웠다. 200도 온도에 45분 정도 구우면 군고구마가 된다. 고구마 개수에 따라 시간이 가감될 수도 있다. 양면뚜껑 팬에 구워도 약한 불로 45분 정도는 두어야 한다. 예전처럼 숯불에 구운 것은 아니지만 껍질이 까뭇한 것을 보니 제법 군고구마 티를 낸다. 물김치 한 보시기를 곁들였다. 어릴 적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고 동치미 국물 쭉 들이켜면 달큼하면서도 시원 짭짤했다. 딱 그 맛이라고는 단정 짓지는 못해도 비슷한 맛을 낸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지금은 줄밤다리 맞은 편 구시벌 언덕에 집을 들여 계시지만, 나는 아직도 고구마를 앞에 두면 고향 집을 마주한 양 정겨워진다.
Tip: 당뇨가 있는 분은 고구마를 주의해서 먹어야 한다. 고구마의 탄수화물이 당으로 바뀌어 혈당을 높이기 때문이다. 고구마를 먹었을 때 속이 더부룩한 것은 '아마이드'성분이 있어서 가스가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럴 때는 무에 함유한 '디아스타아제'성분이 소화 흡수를 도와준다. 고구마를 먹을 때 동치미를 먹는 것은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노정희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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