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예술, 나의 삶]추상표현주의 화가 유주희

추상표현주의 화가 유주희 작가가 스퀴지를 이용해 자신의 화폭을 꾸며내고 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유주희 작가가 스퀴지를 이용해 자신의 화폭을 꾸며내고 있다.

유주희 작
유주희 작 'Repetition Trace of meditation'

1940년대부터 10여 년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특정 세대나 미술가 집단의 다양한 작품을 총괄해 부르는 용어인 '추상표현주의'는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적이라는 뜻의 미술흐름을 말한다. 추상표현주의는 외형적인 형태를 모방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내면의 생명력을 드러내는데, 보통 액션 페인팅, 색면 추상, 문자 추상으로 나뉜다. 이중에서도 '색면 추상'은 평면적으로 채색한 단색 형태나 공간을 통해 명상적 효과를 얻는다.

화가 유주희(62)는 이러한 추상표현주의를 지향하며 그중에서도 '색면 추상' 계열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대구시 남구 이천로에 자리한 건물의 2층 화실은 넓이 158㎡ 규모로 작가의 대형 작품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녀가 2018년 여름부터 화실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제 고향은 경남 하동인데 중학교가 섬진강을 끼고 주변에 소나무 숲이 있어 미술선생님과 함께 자주 현장 사생을 나갔고, 마산에서 여고를 다닐 때는 미술부 사생대회에 나가 상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천혜의 고향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화가를 꿈꾸게 했고, 중고시절 미술 교사의 영향과 '여자도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평소 가르침도 한몫을 했다.

유주희는 영남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다니면서 구상과 유화작업을 했고 부전공으로 택한 판화와 실크스크린 작업도 병행했다. 이후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 육아와 가정생활로 인해 약 20년간 작가로서의 휴지기를 가졌다. 그 사이 1996년 당시 봉성갤러리에서 2인전을 연 적도 있다.

그녀가 화가로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재개하게 된 때는 2001년 대학원 진학과 더불어 이 해에 신조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갖게 되면서부터이다.

"제 작업에서 추상표현주의는 내면의 감성을 조형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이때 조형언어란 구체적인 형태보다는 색이나 면 혹은 선을 통해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유주희의 첫 시리즈 작품이 블랙과 화이트만을 사용한 '형(形)-태(態)'연작이다. 작가는 붓을 쓰지 않고 대신 스퀴지(Squeegee'실크스크린의 인쇄도구로 평평한 목판에 고무로 된 두꺼운 판의 날을 붙인 것)를 쓴다. 여성 작가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선 강한 정신력이 필요했고 작품에서 색감의 대비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걸맞은 도구가 스퀴지였던 것이다. 작가는 널찍한 화면에 아크릴 물감을 흩어놓고 스퀴지를 이용해 밀어내는 작업을 통해 색과 면을 구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연작에서 형(形)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꼴이라면, 태(態)는 꼴 속에 숨어 있는 숱한 사태들이다. 또 이런 작업방식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소품보다 대작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스퀴지로 물감을 밀 때 무의식적으로 작업함으로써 제가 딱히 의도하지 않은 어떤 심상이나 풍경이 재현됩니다. 어떤 이는 '깊은 바다 속 같다', 어떤 이는 '눈 내린 풍경 같다'는 등의 평을 받았죠."

흑백만으로 표현된 '형-태'연작이 작품성에서 조금 단조로운 느낌을 탈피하고자 유주희는 2005년부터 화면의 1/3을 어두운 블루나 옅은 노랑, 빨강 등 다양한 색감을 배치한 '병치혼합 기법'을 화풍에 들여오게 된다. 이러한 화면 구분은 마치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구분을 의미하게 되면서 관람객들에게도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컬렉터들의 호응도 얻게 됐다.

2006년부터는 '형-태'연작이 진화함에 따라 'Landscape over Being'(존재 너머의 풍경)으로 제목을 바꾸게 되고 2008년에는 아예 'Untitled'(무제)시리즈로 탈바꿈하게 된다.

'Untitled'연작은 화면 전체를 우선 유채색감으로 칠한 후 그 위에 푸른 아크릴 물감을 얹어 스퀴지로 전체 화면을 밀어내는 작업을 한 작품들로 오직 작가의 감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나머지는 관객이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각자 어떤 형태로든지 느껴보라는 의도이다.

유주희의 'Untitled'연작은 실제 2차원의 평면미술임에도 색의 대비에 의해 입체감이 도드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이 연작 때부터 화면 전체를 다양한 색으로 페인팅함에 따라 명도가 밝아진다.

"작가는 끊임없이 작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작업하는 화가로 저의 존재를 알아주고 제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이런 바람은 2011년 '블루 시리즈'를 탄생하게 함으로써 유주희의 추상표현주의는 한 단계 더 도약을 한다. '블루 시리즈'는 "작가로서 노동을 보다 많이 투자해보자"는 각오로 지금까지 스퀴지를 이용한 화면 속 면을 보다 잘게 표현하기 시작한 작품들이다.

이어 2013년엔 작은 면들의 집합이라는 패턴에 색을 2중 3중으로 중첩시켜 작업하기도 한다.

"작업하는 동안의 시간과 노력들은 곧 나의 삶 그 자체가 되고, 작품을 통해 나의 삶이 더욱 풍성한 인격체로 만들어 진다고 여겨요."

작가의 말은 그녀의 예술론이자 화가로서 살아가는 이정표와 같은 아포리즘이다.

유주희는 올해 대구예술발전소 전시(4월)와 영천 시안미술관 기획전(9월)이 잡혀있다. 덧붙여 기회가 된다면 내년 쯤 해외 레시던시 활동과 개인전을 열고 싶다고 밝혔다.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