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약(藥)과의 인연이 깊은 고을이다. 약은 생명을 다루는 옛 사람에게 질병을 다스리고 치료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처방이었다. 400년 역사를 지닌, 동양에 알려진 국제적인 약재 거래시장이었던 대구 약령시(藥令市)가 바로 그 증거이다. 오늘날 의약(醫藥) 가운데 한 축인 약재의 국내외 주요 공급처 역할을 했던 곳이 대구였던 셈이다.
이런 대구에 서양 의술은 1899년 선교사가 현재 약전골목 옛 제일교회에 제중원(濟衆院) 간판을 내걸며 시작됐는데, 현 동산병원의 출발이다. 우리 고유의 한의에 양의가 더해지면서 대구에도 동서(東西) 두 축의 의술 진료 모양새를 갖추고 대구의 새로운 의료 역사는 펼쳐졌다.
이후 대구에도 의료인이 양성되었지만, 대구 사람으로 서울의 의료인 양성소에 들어가 의료인의 길을 걷는 인물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서울에 진출한 대구 의료인 가운데 나라를 구하려 했던 의료인도 나타났다. 널리 알려진 제약 담당 이갑성과 잊힌 의사 김문진이다.
이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각각 세브란스병원 제약 주임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3학년생으로 뛰었다. 1889년 태어나 먼저 서울로 간 이갑성은 세브란스의학교 약학과 졸업 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중퇴,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며 고향 후배 김문진(1892~1925)을 대구에 보내는 등 대구 만세운동을 권하며 함께 힘을 보탰다.
1981년 삶을 마치고 1962년 독립유공자가 된 이갑성과 달리 김문진은 대구에서 개업 뒤 함경북도 성진 제동의원 내과 근무 중 병으로 대구에서 요양하다 34세로 요절해 잊힌 존재가 됐다. 그러니 조명은커녕 아예 세월 속에 묻혔다. 게다가 올 3월 1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서훈됐지만 또다시 코로나19로 세상과 대구 후배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의의'(義醫)의 선배 후광인지 코로나19 속에 대구 의료인이 보인 희생적 활약은 빛났고 기릴 만하다. 이번 대구 의료인의 돋보인 행적은 저력의 의료 토양과 유구한 대구 의료사에 걸맞은 결과다. 오랜 한방과 낯선 양방의 동행 세월을 보낸 대구의 의료 앞날은 그래서 더욱 기대할 만하지 않겠는가. 코로나에 빛난 대구 의료인의 흔적은 두 선배 의인(義人)에 결코 뒤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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