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1> 태풍으로 멈춰버린 시간

2022년 9월 6일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덮친 태풍 힌남노…주민 8명 목숨 잃어
눈앞에서 아들과 이별한 어머니, 3년 가까이 트라우마 호소
추모관 찾으면 억장 무너지는 아버지…"아비로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너무 커서 살 수 없어"
많은 물 방류한 농어촌공사·지하주차장 안내한 관리사무소 무죄 또는 공소기각에 유족들 울분

태풍
태풍 '힌남노'가 강타했던 2022년 9월 아파트 지하주자창에 고립돼 목숨을 잃은 중학생 주영군(당시 15세)의 어머니 김은숙씨(55)가 지난달 29일 사고 발생 지점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2022년 9월 6일 태풍 힌남노가 몰고 온 거센 물살이 포항 남구 아파트 지하주차장 3곳을 덮쳤다. 불과 100m 떨어진 냉천이 상류 저수지에서 쏟아져 나온 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범람한 탓이었다. 이 사고로 주민 8명이 목숨을 잃었다.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유족들의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최근 사고 책임자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마저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유족들의 상흔은 더욱 깊어졌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다. 당시 사고의 기억과 트라우마 등을 짚었다.

◆생사를 가른 안내방송

지난달 26일 만난 유족들은 지하주차장 침수 사고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라며 울분을 쏟아냈다. 한국농어촌공사가 많은 물을 방류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 지하주차장에 물이 차오르는데도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주민들에게 차량을 빼라고 한 점 등이 명백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2월 농어촌공사와 관리사무소 관계자에게 무죄 또는 공소기각을 선고했다.

포항 냉천 유가족협의회 이모 대표는 "구속영장만 두 차례 청구됐고 검찰이 중대하다고 판단해 징역 4년을 구형한 사건인데, 무죄가 나온 건 혐의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것"이라며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포항시에 방류 사실을 통보해도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어떻게 판사가 단정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법원의 무죄 판결로 김은숙(55) 씨는 마음을 크게 다쳤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태풍 힌남노가 지하주차장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날.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들 주영(당시 15세)이를 떠나보낸 뒤 은숙 씨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힌남노 태풍은 사고 전날부터 폭우를 쏟아냈다. 9월 5~6일 사이에 하루 최대 541㎜의 비가 내렸다. 20년 만에 기록한 최대 강우량이었다.

제11호 태풍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간 6일 경북 포항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로에 자동차가 침수돼 있다. 이날 해당 아파트의 인근 하천이 불어나 강물이 범람하면서 지하주차장이 침수돼 실종자 7명이 발생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비가 걷잡을 수 없이 퍼붓던 오전 6시쯤. 은숙 씨는 아파트 관리실 방송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하주차장에 물이 들어오고 있으니 차량을 급히 지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다급한 안내였다.

출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에 차량을 세워뒀던 은숙 씨. 주영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함께 출입구 경사로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주민들이 차량을 빼내려 몰려들면서, 주차장은 뒤엉켜버렸고 은숙 씨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 흙탕물이 차량 앞유리를 강하게 내리치며 주차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물이 순식간에 허리까지 차올랐고, 은숙 씨는 아들과 함께 차에서 내려야 했다.

"차량 출입구로는 파도처럼 물이 몰려와 나갈 수 없었어요. 지상으로 올라가는 문들도 물살에 막혀 열리지 않았고요."

◆눈앞에서 아들과의 이별

태풍
태풍 '힌남노'가 강타했던 2022년 9월 아파트 지하주자창에 고립돼 목숨을 잃은 중학생 주영군(당시 15세)의 어머니 김은숙씨(55)가 지난달 29일 매일신문 취재진과 만나 사고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지상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자 은숙 씨는 하는 수 없이 차량 위로 올라갔다. 정전으로 캄캄해진 주차장에선 아들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아 목소리로만 생사를 가늠해야 했다.

빗물은 계속 쏟아졌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천장 아래 30㎝ 남짓한 에어포켓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서서히 물이 차오르면서 은숙 씨는 천장에 달린 전기선을 붙잡고 버텼다.

물은 턱밑까지 차올라 숨조차 내쉬기 힘든 순간, 주영이가 은숙 씨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

은숙 씨도 끝이 될지 모를 인사를 건넸다.

"주영아, 엄마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

물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자 은숙 씨는 천장에 입을 맞대고 흙탕물을 마셔가며 숨을 이어갔다. '하나님, 그냥 이대로 저를 데려가주세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만큼 견디기 버거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조대가 물을 퍼내기 시작하면서 다시 에어포켓이 생겼고 은숙 씨는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외친 건 아들의 이름이었다.

"주영아!"

하지만 주차장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주영이를 포함해 주차장에 있었던 사람들 7명 모두…하늘나라로 가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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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힌남노'가 강타했던 2022년 9월 아파트 지하주자창에 고립돼 목숨을 잃은 중학생 주영군(당시 15세)의 어머니 김은숙씨(55)가 지난달 29일 아들과 같이 지냈던 자택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차가운 물에 오래 잠겨 저체온증이 찾아오고 손에서 힘이 빠져가던 순간, 보트를 탄 소방대원들이 내려왔고 은숙 씨는 14시간 만에 구조됐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내내 아들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남편에게서 '주영이가 천국을 갔다'는 말을 들은 은숙 씨는 그 자리에서 울부짖었다.

◆1년 365일을 아들 생각…비만 오면 트라우마

은숙 씨에게 주영이는 누나들과 10살 넘게 터울이 나는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키가 177㎝까지 자란 주영이는 늘 "엄마는 내가 지켜줄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든든하던 아들을 눈앞에서 떠나보낸 뒤, 은숙 씨 가족의 고통은 지금도 여전하다. 눈만 감으면 주영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루는 병원을 갔다가 주영이 뒷모습과 똑같은 학생이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는데, 제 아들이 아니었어요. 주영이가 제 옆에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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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힌남노'가 강타했던 2022년 9월 아파트 지하주자창에 고립돼 목숨을 잃은 중학생 주영군(당시 15세)의 어머니 김은숙씨(55)가 지난달 29일 매일신문 취재진과 만나 주영군의 학창시절 사진을 내보이며 살아생전 아들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생전 겪어보지 못한 트라우마도 생겼다. 비만 오면 또다시 침수가 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10시간이 넘게 지하주차장에 갇혀 있었던 기억 때문에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지금도 창문을 열어둔 채 지내고 있다. 숨이 막히는 느낌을 떨치기 위해서다.

은숙 씨는 아직도 아들을 떠나보낸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영이가 5살 때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남편은 아들과의 모든 추억이 이곳에 남아 있다며 떠나지 않아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저는 지하주차장에 차를 빼라고 방송한 아파트 관리사무실도 싫고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 추모관 찾으면 억장이 무너져

같은 아파트에서 아들 서보민(당시 22세) 씨를 떠나보낸 서모(58) 씨의 삶 역시 무너졌다. 서 씨는 당시 해병대를 전역한 지 5개월 된 아들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주차장이 물에 잠기기 직전 기적적으로 차를 타고 나온 서 씨와 달리, 보민 씨는 출입구에서 먼 곳에 세워둔 차량을 빼려다 끝내 나오지 못했다.

"저와 아들이 탄 차가 바뀌었다면 운명도 달라졌겠죠. 아비로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커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서 씨의 아들 서보민(당시 22세) 씨. 2022년 9월 포항을 강타한 태풍 힌남노로 침수된 지하주차장에서 보민 씨는 탈출하지 못했다. 지하주차장에서 물이 들어찼을 당시 자동차에 갇힌 운전자의 문을 열어주고 어르신의 대피를 도왔던 보민 씨는 지난 2023년 3월 의사자로 인정받았다. 서 씨 제공
서 씨의 아들 서보민(당시 22세) 씨. 2022년 9월 포항을 강타한 태풍 힌남노로 침수된 지하주차장에서 보민 씨는 탈출하지 못했다. 지하주차장에서 물이 들어찼을 당시 자동차에 갇힌 운전자의 문을 열어주고 어르신의 대피를 도왔던 보민 씨는 지난 2023년 3월 의사자로 인정받았다. 서 씨 제공

서 씨의 먹먹한 마음은 매년 태풍·장마철이 되면 더욱 깊어진다. 그럴 때면 옷장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인사를 건네곤 한다.

"'보민아 아빠 회사 다녀올게'라고 얘기를 한 뒤에 집을 나서요. 3년이 지났지만 집안에 보민이의 물건들이 보일 때면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보민 씨는 지난 2023년 3월 의사자로 인정받았다. 지하주차장에 물이 들어찼을 때 자동차에 갇힌 운전자의 문을 열어주고 어르신들의 대피를 도왔던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매달 아내와 보민이가 있는 추모관을 찾는 서 씨. 이곳에서 아들을 마주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눈물을 쏟고 있다.

"훌륭하게 커서 장하고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요.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추모관을 가면 그제야 실감해요. 보민이가 세상에 없다는 걸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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