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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 세체다(Seceda)와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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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오들러 산군으로 향하는 세체다 트레일. 하태길 교수
오들러 산군으로 향하는 세체다 트레일. 하태길 교수

산이 이렇게 날카로울 수 있을까.

오르티세이(Ortisei)에서 케이블카에 올랐다. 푸르네스(Furnes)에서 한 번 갈아타고 다시 올라 세체다(Seceda)에 내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거대한 암봉(巖峰)들. 마치 누군가 압도적인 규모의 바위산을 잘라 세워놓은 듯, 톱날처럼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실제 산이라기보다 공들여 바위를 깎아놓은 조각작품 같았다.

해발 2,519m 능선 위의 세체다 십자가. 하태길 교수
해발 2,519m 능선 위의 세체다 십자가. 하태길 교수

왼쪽 오르막길을 따라 조금 걷자 해발 2,519m 능선 위에 세워진 십자가가 나타났다. 돌로미티(Dolomiti)의 산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는 이제 낯설지 않은데도 또 한 번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십자가 앞에 서자 비로소 세체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에즈 -오들러(Puez-Odle) 산군을 비롯해 사스롱고(Sassolungo), 셀라(Sella) 산군이 360도 파노라마를 만들었다. 그중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뾰족한 오들러 산군이 세체다를 상징하는 풍경이다.

북쪽으로 아찔한 절벽이 이어진 세체다. 하태길 교수
북쪽으로 아찔한 절벽이 이어진 세체다. 하태길 교수

약 2억 년 전, 이곳은 바다였다. 바닷속에서 쌓인 지층과 산호초가 지각의 융기와 오랜 침식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세체다 모습이 되었다. 한때 바다였던 곳에 지금은 구름보다 높은 바위가 서 있는 것이다.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발끝 하나 잘못 디디는 순간 아찔할 것 같은 절벽이 이어졌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날카로운 암벽 아래로 초록빛 여름이 초원이라는 이름으로 생동감을 나눠주고 있었다.

남쪽으로 여름 초원이 펼쳐진 세체다. 하태길 교수
남쪽으로 여름 초원이 펼쳐진 세체다. 하태길 교수

거칠고 날카로운 암벽과 부드럽고 평온한 초원.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풍경이 나의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동시에 즐겁게 하면서 세체다의 첫인상을 만들어냈다. 초원을 따라 천천히 하산 트레킹을 시작했다. '리푸지오 피렌체(Rifugio Firenze)'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한참을 내려 오들러 산군으로 향하는 갈림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5유로의 통행료를 받는 안내 요원이 길을 막고 있었다. 조금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길에 가격표를 붙여놓은 셈이었다. 잠시 망설였다. 눈앞에 펼쳐질 풍경을 돈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 대가 없이 걸을 수 있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나는 풍경에 붙은 또 다른 가격표를 만났다. 돌로미티 수퍼썸머패스(Super Summer Pass)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2026년부터 세체다는 패스에서 제외됐다는 것이다. 결국 별도의 케이블카 티켓을 구입해야 했다.

한때 산악인과 트레커들에게 더 익숙했던 세체다에 2023년 9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애플(Apple)이었다. 애플은 신형 아이폰의 카메라 성능을 보여주며 돌로미티의 세체다 풍경을 화면에 띄웠다. 누군가에게는 한 장의 아름다운 사진이었지만, 세체다에게는 세계인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거대한 광고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SNS에 세체다 사진이 넘쳐났고 어느새 세계적인 셀피(Selfie) 명소가 되어 있었다. 2024년 여름에는 하루 약 4,000명이 몰렸다는 현지 보도까지 있었다. 아름다움이 유명세를 얻은 뒤 세체다는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이라는 새로운 고민까지 떠안게 되었다. 수퍼썸머패스에서 제외된 것은 관광객 과밀의 한계를 넘어 더 많은 관광객보다는 세체다만의 가치를 찾는 여행자들을 선택하겠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세체다 정상에서 바라본 셀라 산군. 하태길 교수
세체다 정상에서 바라본 셀라 산군. 하태길 교수

나는 세체다가 건네는 또 다른 풍경에 마음을 맡긴 채 걸음을 이어갔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풍경을 바라보기를 여러 번. 거대한 암봉이 어느새 멀어지고 있었는데 산 정상에서 마주했던 세체다의 날카로움은 맑은 하늘 속 뭉게구름이 쓰다듬어 주었는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누군가 커다란 붓을 들고 파란 하늘 위에 구름을 그려준 것일까? 라는 착각에 빠질 만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보느라 하산하는 걸음이 느려졌다. 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풍경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트레킹 길에는 생각보다 돌이 많았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무릎에 조금씩 부담이 느껴졌다. 마음은 자꾸 앞서가고 싶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세체다가 보였다. 걷다가 뒤돌아보고, 또 걷다가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세체다는 내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피렌체 산장이 가까워지자 거대한 암봉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피렌체 산장에 도착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높은 암벽에 둘러싸인 산장은 멋진 풍경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콜라이저(Col Raiser)로 내려가야 했다. 케이블카 표식은 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케이블카 승강장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내려오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나? 멋진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산장 레스토랑에서 쉬고 있던 트레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케이블카 타는 곳이 어디예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아, 지하라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피렌체 산장은 원래 잠시 쉬어 가야 할 곳이었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온통 '혼동의 도가니'로 남아있다. 제대로 쉬어 보지도 못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부랴부랴 콜라이저로 내려갔다. 콜라이저에서 352번 버스를 타고 오르티세이(Ortisei)로 돌아왔다. 산 위에서 몇 시간 동안 걸었던 길을 버스 안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었지만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창밖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미 그 길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니까.

오르티세이로 돌아와 점심을 먹으며 묵직해진 다리를 풀었다. 발가르데나(Val Gardena)의 목각 전통을 잇는 목조 조각부터 물 주전자를 든 청동상, 하늘을 향해 솟은 장미 한송이 조각까지. 오랜 전통과 현대 미술이 꽃과 색색의 건물에 어우러진 오르티세이는 동화책처럼 작고 다정한 마을이었다.

세틸 보행자 다리에서 바라본 오르티세이. 하태길 교수
세틸 보행자 다리에서 바라본 오르티세이. 하태길 교수

마을을 잇는 세틸 보행자 다리(Ponte Pedonale Setil)를 건너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로 향하는 곤돌라에 올랐다. 곤돌라에 함께 올라탄 낯선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다. 폴란드에서 일하고 있는데 잠시 휴가를 내어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폴란드에서 일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저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곤돌라가 높이 오르자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의 물결에 우리 모두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그 초록의 풍경은 무거웠던 대화를 잠시 멈추게 하고 굳어 있던 공기를 풀어주었다. 우리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약속이나 한 듯 만국 공통의 감탄사를 연발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고산 목초지, 알페 디 시우시. 하태길 교수
유럽에서 가장 큰 고산 목초지, 알페 디 시우시. 하태길 교수

해발 약 2,000m에 이런 광활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초원 사이로 그냥 들어가 걷고 싶을 정도로 평화롭고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알페 디 시우시는 유럽에서 가장 큰 고산 목초지 가운데 하나다. 약 800종에 이르는 꽃과 양치식물이 자라고 있어 특히 여름이면 초원 전체가 거대한 정원처럼 변한다고 한다. 멀리서부터 어서 오라고 계속 손짓했다.

세체다에서는 자꾸만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페 디 시우시에 들어서자 시선은 자연스럽게 발밑으로 향했다. 작은 꽃과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 초원의 고요를 깨워주는 워낭소리. 군데군데 자리한 작은 초원의 집들은 마치 누군가 풍경 속에 살짝 올려놓은 그림 같았다. 처음에는 끝없이 평평해 보였다. '여기라면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좋겠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초원 안으로 들어섰다.

폭신한 초록 융단이 깔린 알페 디 시우시. 하태길 교수
폭신한 초록 융단이 깔린 알페 디 시우시. 하태길 교수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알페 디 시우시도 역시 돌로미티였다. 평평해 보이던 초원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났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자꾸 웃음이 났다. 폭신한 초록 융단을 밟으며 천천히 걷다 보니 발끝에 닿는 풀잎의 감촉마저 기분 좋았다.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풀쩍 뛰어보기도 했다. 손을 뻗으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조각구름 하나쯤은 금세 잡힐 것만 같았다.

목가적인 풍경안에서 소년이 된 트레커. 하태길 교수
목가적인 풍경안에서 소년이 된 트레커. 하태길 교수

이곳에서는 트레킹에 온전히 몰두하기보다 발걸음을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고, 초원에 앉아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걷는 시간보다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멀리 이어지는 산, 한가롭게 풀을 뜯는 가축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트레커가 아니라, 자연과 어울려 한바탕 놀고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요즘 말하는 '경험이 곧 콘텐츠가 되는 여행'일 것이다. 누가 만들어준 광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걷고, 느끼고, 찍은 순간이 다시 누군가의 여행 욕구를 자극한다. 알페 디 시우시에서는 여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미디어가 된다.

하루 동안 두 개의 돌로미티를 만났다. 하나는 날카로운 암봉을 올려다보게 했고, 다른 하나는 발밑의 작은 꽃을 바라보게 했다. 세체다가 찍고 싶은 풍경이라면 알페 디 시우시는 마음껏 머물고 싶은 자유를 가져다 준 풍경이었다. 두 풍경을 떠올리며 최근 네팔을 휩쓴 홍수의 참혹한 장면이 문득 겹쳐 졌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산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후변화로 변해가는 산이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찾아간 그 아름다운 풍경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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