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물길 5백리, 섬진강. 물은 산맥을 따라 이 고을 저 고장을 굽이굽이 돌아 남해로 길을재촉한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3개도 12개군을 적시며 물의 고장 하동(河東)포구에 다달아그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경상과 전라도의 접경, 하동. 그곳에는 고향같은 포근함이 있다. 가슴깊숙이 스며드는 따뜻함. 질박한 낭만이 남아있다. '어머니 눈웃음 닮은 돌각담길 조붓조붓 나있고/보리밭 실개천지나 앵두가지마다 불밝힌 오롯한 풍경이 보인다'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가. 장승같은 지리산을 등에 업고 남녘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고장. 하동과 구례, 화개와 악양….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고을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의 장엄함과 비단같은 섬진강의 평화로움이 조화를 이룬 이 땅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하동군 화개면 탑리 화개장터. 고찰 쌍계사초입에 자리잡은 이 장터에 들어서면 김동리의소설 '역마'가 생각나고 가수 조영남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먼저 객을 반긴다. 예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물산이 교환되며 지리산의 갖가지 산물이 흘러들어 제법 북적거림이 있었다. 온갖 산나물이 돋고 바다생선, 강고기들이 뭍오름을 할 무렵. 화개에는 더덕 도라지 고사리 두릅을 등에 짊어진 지리산 사람들이, 실 바늘 면경 골백분을 싸든 곡성·구례쪽 황화물 장사치들이, 김 미역 청각 자반조기 간고등어를 펼쳐놓는 하동 어전상들이실팍한 웃음을 흘리며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섬진강이 수문을 연 이래 영남과 호남을 잇던 이곳에삼한시대에 화개관으로 불린 요새가 장터역할을 했다는 얘기와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시장이 되어 객주의 오고감이 끊이지 않았다는 내력만 전해내려올 뿐이다. 40~50평 남짓한 이 시골장터에는 싸구려 옷가지들과 산나물 꾸러미가 닷새만에 선 장을 채우지만 옛날의체취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지리산을 오르거나 쌍계사를 찾아나선 관광객들이 그저물끄러미 쳐다보며 스쳐지나갈뿐. 사람 사는 모습이 달라졌는가. 그래도 하동에는 까닭모를정다움이 있어 먼 길 떠난 사람들의 발길을 설레게 한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양쪽에 낀 19번 국도를 내달린다. 화개에서부터 제법 강폭이 넓어지면서하동에 막 접어들면 명주실처럼 고운 황금빛 모래와 잔물결이 함께 어우러져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느릿한 물흐름이 급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평온한 그 강물에는 허리를 잔뜩 굽히거나 온몸을 강물에 잠긴채 장대를 휘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섬처럼 떠 있다. 강바닥을 훑어내는 아낙네들의 재첩잡이. 모래를 떨어내는 긴 장대가 비록 힘에 겹지만광주리에 쌓여가는 씨알같은 재첩들로 삶은 그럭저럭 살아볼만한 것이다. 밥하는 냄새가 집을 향하는 마음을 재촉하는 저물녘, 누렁이를 앞세워 마을앞으로 나설 아이들 생각에 강물에 몸을 맡긴 아낙들의 손놀림이 더욱 바빠진다.
맑은 섬진강을 끼고 화개에서 하동까지 하동포구 80리길에 오르면 이끼를 먹고 사는 은어와참게, 재첩이 입을 즐겁게 하고 쌍계사로 오르는 고즈넉한 십리 벗꽃길과 화개나루, 광평나루, 섬진나루, 상저우나루의 줄나룻배로 마음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넉넉한 지리산을 닮아서일까. 묵묵히 흘러가는 섬진강은 찾아오는 사람마다 안식을 내준다. 시원한 강바람 한줄기로, 때로 비를 머금은 먹장구름으로 사람들을 반긴다.
지리산에 다달아 이제 그 긴 허리를 접고 끝자락을 보이는 소백산맥. 억수같은 비에 지리산이 온통 물천지다. 조용하기만하던 계곡이 어느새 우당탕쿵탕 물소리로 소란스럽다. 한번씩인간들에게 자연의 변화를 알리려는 경고일까. 뭇사람들이 그 뜻이야 알든 모르든 산맥은조용히 바다를 향해 내려앉고 강은 나직이 몸을 낮춰 흘러든다. 그 사이에 많은 목숨들이허허로이 자연으로 돌아갈뿐. 산맥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저 영원한 시간과 짧은 우리네 삶이 그속에 녹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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