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서 부르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이스탄불에서 서남쪽으로 2백50㎞ 남짓 떨어져있는 이 도시로 가기 위해선 중간에 카페리로 갈아타고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너야 했다. 부르사는 대구와 아주 흡사한 섬유도시. 원사부터 직물·염색에다 봉재까지(업스트림부터 미들스트림까지) 비슷한 섬유공정을 갖춘 점이 닮았다.
부르사는 특히 터키의 여러 섬유도시중 합성직물 염색가공으로 유명하다. 우리 합성직물 생지(가공하지 않은 원단)를 수입, 염색가공해 재수출하는 본산지인 셈이다. 부르사 시가지는생각보다 깨끗했다. 대로변에 늘어서있는 봉재공장들은 오피스 빌딩으로 착각할 만큼 번듯했다. 기자와 동행한 에이전트 서울트레이딩의 민우평 부장은 부르사와 터키 섬유산업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했다.
"터키의 5대 섬유산지는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데니즐리·아다나·부르사입니다. 5대산지중부르사가 가장 작지만 폴리에스테르 직물가공을 전문으로 한다는 점에서 우리 섬유수출업체에겐 중요합니다. 부르사엔 약 5백20개 정도의 제직가공소가 있는데 한국·타이완·일본 등지로부터 폴리에스테르 직물을 수입, 가공해 유럽과 미국시장에 내다팝니다. 따라서 물량보다 품질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부르사 염색업체들의 기술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나염 특히 발염처리 기술은 한국보다 뛰어나죠. 그러니 터키업체들은 가공하지 않은 생지나 PFP(백단·전처리단)를 수입, 가공해서재수출하려고 합니다. 아마 우리의 대터키 섬유수출 물량중 생지수출 물량이 20~30%는 될겁니다. 부가가치가 낮은 생지수출은 피하려고 하지만 바이어 주문이 생지일색인데 별수 있나요. 생지수출로 쿼타가 소진돼 하반기 쿼타가 아주 타이트합니다"
민부장과 함께 부르사의 나염 및 프린팅업체인 '프린텍스'를 찾았다. 30대초반의 젊은 사장메테 말시오글루가 기자를 맞았다. 그는 시장상황과 관련, "품질이나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시장이 문제"라며 "전세계적으로 옷사는데 돈을 안쓴다"고 말했다. 프린텍스는 6대4의 비율로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한다고 했다. 공장을 둘러보자는 요청에 그는 선선히 응했다. 컴퓨터 제어 자동화 시설을 갖춘 공장은 무척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염색공장 특유의 악취도 거의 느낄수 없었다. 공장규모를 묻자, 그는 "부르사의 염색업체 2백여개중 11번째쯤 된다"고 밝혔다.
프린텍스외에 직물업체 투르크칸, 직물 및 봉재업체 OEO 등 부르사 시내를 돌다 한국서 출장온 에이전트 '보인 마니아'의 남명환 이사를 만났다. 그는 "생지물량도 많지만 PFP 수출물량이 더 많다"고 밝혔다.
터키시장에서 한국산 폴리에스테르 직물은 물량면에서 아직까진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일본업체들의 수출단가 인하, 타이완업체들의 맹추격으로 인해 한국산 폴리에스테르 직물의 우위는 위협받고있다. 일본업체들은 과거 우리보다 야드당 2, 3달러이상 비싼 값에 팔던 고급원단을 최근 엔화약세에 힘입어 1달러 차이 안팎의 값으로 내려받고있다. 전통적으로 겨울제품에 강세를 보인 타이완 업체들의 쿼타 물량은 우리의 1/5에 불과하나 논쿼타인중국산으로 둔갑시켜 터키시장을 넘보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은 우리 업체끼리 과당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부르사에서 서울트레이딩의 민부장과 보인 마니아의 남이사가 숨바꼭질하듯 번갈아 같은 업체를 방문, 수출상담을 벌인 것은 극심한 경쟁의 한 단면이다. 반면 일본업체의 경우종합상사들이 섬유수출을 대행, 바이어들의 횡포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고 있다. 타이완 업체들도 업체별로 아이템을 특화시켜 우리처럼 같은 제품을 생산, 제살 뜯어먹는 경쟁은 피하고 있다.
터키시장의 전망은 어떨까. 서울트레이딩의 민부장은 "장사되는 곳은 터키밖에 없다고 하지만 터키시장도 이제 끝물"이라고 주장했다. 폴란드와 두바이 시장보다 터키시장이 상대적으로 좋아보일 뿐이지 곧 '단물'이 빠질 예정이란다. 면·모직과 레이온에 강점을 지닌 터키섬유산업이 취약 분야인 합성직물에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설비를 증설하고 있는 것이다.보인 마니아의 남이사는 "터키는 두바이·홍콩과 달리 생산설비를 갖춘 시장"이라며 "폴리에스테르를 제외한 나머지 터키 섬유산업은 2000년이후 한국을 능가할 것"이라고 보았다.내수시장 규모(인구 6천5백만명)도 크고 동구권 및 CIS제국 등 주변 수출시장 여건은 좋으나 장기적으론 우리의 경쟁국이 될 것이란 예상이다. 동국무역 이스탄불지사의 성동훈과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성과장은 "우리 화섬사 수출국중 터키가 4위권"이라며 "합성직물 생산시설이 늘고있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부르사의 원사공장은 5개로 쇤메즈·쉬파시·메르기스·코르텍스·사반지 등 터키 섬유대그룹들의 소유. 여기에 터키의 섬유 대그룹중 하나인'악바실라르'는 선경을 파트너로 원사공장 건립을 추진중이라고 우리 섬유수출 관계자들은전했다.
터키시장 마저 위축된다면 우리는 수출활로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해외 마케팅을 강화하는게 첩경이라고 우리 섬유수출관계자들은 주장했다. 동국무역의 성과장은 "터키시장뿐 아니라 유럽·미국·중남미·홍콩·두바이·폴란드등 전세계시장의 동향을 모두 체크해야 뒤통수를 맞지 않는다"면서 해외시장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역 섬유수출업체는마케팅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해외 상설전시관 마련 등 구체적 실천계획은 세우지 않고있다. 터키는 이스탄불 중심가와 공항사이 '이키타일러'지역에 대규모 원단시장을 건설하고있다. 이스탄불 직물시장 '오스만 베이'의 바이어 메흐메트 달건은 이와 관련, "한국 직물수출업체들이 새 원단시장에 상설전시관을 열어 바이어들의 편의를 도모하면 좋을 것"이라고말했다. 마케팅 강화의 방편으로 터키·폴란드·두바이·홍콩 등 중개시장을 거치지 않고엔드 마켓(End-Market:최종 소비시장)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방향도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동구권과 CIS제국, 아프리카 등지는 아직 미성숙 시장이어서 최소한 5년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게 우리 섬유수출 관계자들의 중론이었다.
홍콩·두바이·이스탄불 등 지역 섬유수출시장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세계경제 불황으로 인해 수출환경이 악화된 영향이 컸다. 그러나 시장상황을 무시한 주먹구구식 수출과대량생산으로 인한 과당 경쟁, 수출창구 난립 등 우리 수출업체의 잘못이 더 크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도 지역 수출업체들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바이에서 만난한 섬유수출관계자의 말이 귀울림으로 남았다.
"대구 직물업체 오너들이 불쌍해요. 그들은 망해도 우리는 살아남습니다"
〈끝〉
〈 부르사에서 曺永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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