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파노라마 20세기 문화(12)-이고르 스트라빈스키

1913년 5월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제1차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듯 거센 파괴력과 혼돈, 야만스런 에너지로 가득찬 한 음악적 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발레단의 '봄의 제전'초연무대 때문이다.주인공은 러시아태생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 이날 그는 20세기 음악에 도전장을냈다.

호기심 강하고 성미가 급한 파리 청중들에게 '봄의 제전'은 한마디로 이단이었다. 힘찬 리듬과 짓눌려 있는 멜로디,복잡한 화음의 얽힘과 강렬한 악기음향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견뎌내기 힘든 새로운 음악이었다. 서주 제1소절에서부터 우려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높은 음역의 파곳 멜로디가흐르자 객석에서는 비웃음소리와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것도 음악이냐며 비웃는 사람들과 옹호하는 사람들의 고함으로 극장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봄의 제전'의 탄생이다. 이 작품은 이듬해1914년부터 4년간 유럽전체에 휘몰아친 1차대전이라는 폭풍의 전조였다.

이고르는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와 인접한 오라니엔바움(현재 로모노소프)에서 태어났다. 그의아버지는 마린스키극장의 유명한 베이스가수 표도르 이그나체비치 스트라빈스키(1843-1902). 표도르는 비록 자신이 성악가로 성공했지만 아들 이고르만큼은 음악보다 법률을 전공하도록 권고했다.

결국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처럼 이고르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05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서 음악에의 길은 분명했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원장이었던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찾아가 통사정한 끝에 그의 문하에서 3년동안 작곡을 배웠다. 그동안 몇몇 작품이 쓰여졌지만 1908년 그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첫 작품이 발표된다. '스케르초 판타스티크'와 '불꽃'이다.

'불꽃'의 화려한 관현악 음향은 신출내기 이고르를 세상에 알리는 출발점이었다. 이 작품으로 러시아 발레단의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젊은 이고르는 디아길레프로부터 파리공연을 위해 발레모음곡 '불새'작곡을 의뢰받았다.

1910년 초연된 이 발레음악으로 스트라빈스키의 이름은 하룻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이듬해 파리초연때도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뒤이은 '봄의 제전'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온 유럽에 센세이션을불러일으켰다.

훗날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두고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봄의 제전이 뚫고 지나가는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고.

이 작품을 쓸 무렵 정신적으로 초조했던 자신의 내면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봄의 제전'중 서주부를 자기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음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리 샹젤리제극장에서 소동을 불러일으킨 악명높은 바로 그 대목이다.

여러가지 음악소재가 풍부하게 들어있고 다채로운 악기 사용법때문일까.

억제된 색채와 원초적 생명력이 가득찬 이 음악은 진정 19세기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맛을 던져주었다. 곡을 쓸 당시 러시아어로 스케치북에 적어놓은 '고동이 있는 곳에 생명이 존재하듯이 음악은 리듬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는 상징적인 글이 이단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세계를 뒷받침해준다.

1914년 러시아로 돌아갔다 스위스의 한적한 시골마을 모르즈에 머물고 있던 스트라빈스키는 '현악4중주를 위한 3개의 소품' '여우' '결혼' '병사의 이야기'등과 같은 실험적인 작품을 썼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봄의 제전'에서 신고전주의로 옮아가는 과도기적 곡들이었다.'신고전주의'라는 용어에서 우리가 처음 연상하게되는 이름은 바로 스트라빈스키다. 그가 최초의완전한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풀치넬라'(伊나폴리 대중연극의 주인공)를 처음 쓴 때는 1919년이었다.

'봄의 제전'과 '신고전주의 음악'으로 현대음악의 이단아로 불리는 스트라빈스키는 1914년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39년 미국으로 이민한후 62년 80세가 되기까지 다시는 조국 러시아땅을 밟지 않았다. 71년 뉴욕에서 사망한 그는 현재 이탈리아 베니스 산 미셀섬의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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