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궁중시의(宮中侍醫)였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1869~1911)가 한국체류 기간에 보고 느낀 바를 책으로 엮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학고재)가 번역,출간됐다.
분쉬 박사는 1901년 11월 지금의 인천인 제물포로 입국해 한국생활을 시작했으며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4월 서울을 떠났다. 그는 그동안 고종의 시의이자 시중개업의로서 한국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해 편지와 일기로 남겼는데, 이는 당시 한국사회를 객관적 시각에서 복원한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분쉬는 1901년 11월 2일 제물포에 도착해 그 소감이 담긴 편지를 이튿날짜로 썼다. 그는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5천여명이 살고 있다"고 전하고 "인형처럼 작고 예쁘장한 일본여인들이 폭이 넓은 비단 기모노를 입고 작은 나무토막으로 굽을 두개씩댄 나무 샌들을 신고 종종걸음으로 다니고 있는 반면 흰옷을 입은 한국남자들은 머리에 검고 뻣뻣한 모자를 쓰고 장중하게 거닐고 있다"고 말했다.
분쉬는 그해 12월 10일자 편지에서 "지금 이곳(서울) 상황은 독일의 1848년 3월 혁명시기와 흡사해 황제는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껴 궁을 떠나지 않는다"면서 "모든 행정기구가 불안정하고, 신용도 없고, 고관에 줄을 대고 아졸들이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부당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사회상을 나타냈다.
분쉬는 한국의 의료상황에 대해 이듬해 2월 5일자와 8월 16일자 편지에서 "국민의 신앙심에 어긋난다 하여 해부를 금하고 있으니 의학이 발전할 리 없다"고 안타까워하고 "진료수가로 간혹 수백개의 계란을 받기도 하나 한국사람은 돈내는 습관이 들지 않아 무료로 봉사하면서 수술법이나 잊지 않으려고 한다"고 전하기도 했다.그는 8월 16일자를 통해 "최근 산모의 아기를 처음 받았는데, 이는 보기 드문 뉴스감으로 한국여인은 남자의사의 진찰을 받거나 도움을 받기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03년 9월 이후 쓴 편지와 일기에는 러·일전쟁 소식이 많이 언급돼 있다.
그는 2월 9일자에서 "제물포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의 야간전투에서 울려나오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긴박감을 전한 뒤 "저녁에 일본군 보병 3천명이 횃불을 밝힌 채 상륙했으며 러시아 전함 한척이 일본 전함의 추격으로 제물포항 밖에서 침몰했다"고 기록했다.
분쉬는 또 8월 13일자에서 "몇 주 전 서울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나 일본인이 도시를 장악해 남산 위에서 대포를 쏘는 단호한 조치를 내렸다"며 "한국사람들은 일본의 술책에 말려든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나라의 안녕을 말하고 글로 쓰거나 행동에 가담하는 관리가 있으면 일본군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붙잡아가 귀양을 보낸다"며 당시의 험악한 시대상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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