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보리가 패었다. 보리를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내 유년의 기억 한켠에 이상한 감동으로 머무르고 있는 어느 광인이다. 들리는 소문으로 그는 대학 출신의 재능있는 젊은이라고 했다.
그 때, 사람들은 보리 농사를 많이 지었고, 거둬들인 보리는 도리깨질을 하여 탈곡을 했다. 그러자면 품이 꽤 필요하여 자연스레 그를 도리깨 대열에 불러들였다. 그는 힘이 세어 하루 종일 도리깨질을 하여도 지치지 않았다. 도리깨품을 판 대가로 그가 지불받는 삯은 세 끼 밥이 고작이었다.
그는 그걸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주발 위로 수북이 담긴 보리밥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에겐 하루 세 끼의 밥이 필요하였고, 그것만 해결되면 행복한 것 처럼 보였다.
그를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도리깨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황혼 속의 철길 위로 휘적 휘적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철길을 걸으면서 무엇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끊임없이 지껄였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르며 돌을 던지거나 가끔씩 가까이 다가가서 어떤 말을 대며 그걸 영어로 이야기해 보라 주문하곤 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둘 밖에 없다. 하나는 '정거장에 간다'를 영어로 뭐라 하느냐 물었을 때'고 투 스테이션'이라 한 그의 대답이다. 그건 의미없는 말의 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깨달았다. 그 말을 아직껏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말을 할 때의 특별한 정경, 이를테면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한 그림자 같은 그의 모습, 어스름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철길이 주는 묘한 신비감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가 한 말을 알아들었다는 자랑스러움으로 한동안 무슨 주문처럼 외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도둑이 높으신 분 댁을 방문해 보니 달러가 한 보따리 있더라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지금 보리밭을 지나고 있다. 보리 위에 광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는 핏빛으로 타는 황혼속으로 휘적 휘적 걸어가며 중얼거린다.
-인생은 울리는 종과 같은 것. 비워야 맑은 소리가 난다네.-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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