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17일 현해탄에 불어닥친 태풍은 꿈에 부푼 우리동포들을 가득 태운 귀국선들을 삼켜 버렸다. 태풍이 통과한 다음날 아침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시 부근 북쪽 해안에 약 60여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당시 시청 청소과에 근무하던 엄정남(嚴正男)씨는 출근길에 그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최근 일본서 출판된 사진자료집 '청산안된 소화사(昭和史)'에 수록된 그의 증언을 인용한다.
수일후 그는 또 다시 부근 해안에서 20여구의 시체가 바닷가 모래톱 가까이에 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들개들이 몰려들어 시체를 물고 있다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부근에서 삽 등 도구를 빌려 자전거에 싣고 현장으로 가서 해안가 언덕 위에 구덩이를 파고 모두 매장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해방된 조국을 눈앞에 두고 귀국 직전에 안타깝게 숨진 동포들의 유해가 매장된 언덕은 그후 고다야마(小田山)묘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그곳은 마음대로 파헤쳐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양심적인 지역 시민단체들에 의해 잘 정비돼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유해가 매장됐던 그곳 주위에 누군가 무궁화를 심었고 그 나무에도 꽃이 피어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당시 하카타(博田) 항구에서의 송환이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연합사 당국은 매일 1천500명씩 사세보(佐世保)항구로 보내기도 했으나 해결은 어려웠다.
귀국선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비용은 더 늘어나고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려 빈털터리가 된 가족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해방조국을 눈앞에 두고 귀국을 단념하는 동포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식량도 떨어져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고 또 다시 일거리를 찾아 유민(流民)이 돼 일본 전국 각지로 흩어지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현재의 재일 한국·조선인의 대부분은 이러한 운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확실하게 송환문제를 처리하지 않았던 관계로 오늘의 재일교포문제라는 비극이 생겨난 것이다.
차별과 편견이라는 고난의 역사가 탄생했으나 그후 불굴의 의지로 재일교포사회도 크게 발전했다. 또한 재일교포 가운데는 일본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지위에 오르기도 하는 등 한일양국 교류에 있어서도 귀중한 윤활유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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