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아파트의 나라. 작년말 현재 무려 472만호. 전체 주택 수의 43%가 아파트이다. 건교부 추산대로라면 연내 50%를 돌파할 전망. 싱가포르·홍콩 등 도시국가를 뺀다면 아파트 거주 비율은 세계 1위. 그런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한 두 번 이상 이용하기 마련인 것이 엘리베이터이다. 한 평도 채 못되는 그 좁은 상자 안에서 오늘도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다.
대구시 대곡지구의 대단지 한 아파트 16층에 사는 허정진(36)씨. 이 아파트로 이사온 것은 일년 전이지만 그에게는 이웃이 없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월급쟁이가 아파트에서 이웃사촌을 만들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1분이 아쉬운 아침 출근시간. 후닥닥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는 허씨에겐 엘리베이터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단추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놈은 이제 막 15층을 지나 13층으로 향하고 있는 중. 바쁜 출근 시간이면 유감없이 진가를 발휘하는 '머피의 법칙'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
엘리베이터 한 대를 가운데 두고 20층 40가구가 다닥다닥 붙은 허씨 아파트 라인의 아침풍경은 이른 아침 다세대 주택의 공동 화장실 앞을 연상케 한다. 두루마리 화장지 대신 책가방이나 짐 가방을 둘러맸을 뿐. 초조한 기다림이 연발되는 점에선 똑같다.
느림보처럼 1층까지 엉금엉금 내려갔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허씨의 16층까지 올라오는 데는 정확하게 1분40초가 걸렸다. 게다가 '딩동댕' 소리와 함께 그놈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야속한 엘리베이터는 16층을 지나 17층, 18층을 자꾸만 기어오른다. 드디어 맨 꼭대기층까지… 이쯤되면 허씨의 화도 함께 머리 꼭대기까지 괜히 치솟는다. 자칭 교양인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더러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까지 뱉는다.
현관문을 나선 후 정확하게 2분17초를 기다린 후에야 허씨는 그놈을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가 뚫어져라 벽면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모습이 어색하기 말할 수 없다. 얼굴 마주치기가 어지간히 쑥스러운 모양.
쑥스럽기는 허씨 역시 마찬가지. 재빨리 반대편 벽면 거울에 얼굴을 파묻고, 집 나서기 전에 열 번도 더 빗질했던 머리를 다시 살핀다. 혹시 코털이 볼썽사납게 삐져 나오지 않았을까 꼼꼼히 살핀다. 발 아래엔 지난 밤 늦은 퇴근길의 허씨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토악질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층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가 주기를 바랐지만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멈춰 버렸다. 절대로 얼굴을 마주치지 말리라 다짐했지만, 순간의 실수로 새로 입장한 10층 사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낯익은 남자였지만 이름도 직업도 몇 호에 사는지도 알지 못한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
예상치 못한 위기를 넘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보일듯 말듯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 물론 입을 떼거나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눈치빠른 상대가 인사를 받아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그만이다. 거울 있는 벽면을 차지하지 못한 10층 사내는 허씨 코 앞으로 뒤통수를 들이밀며 엉거주춤 돌아섰다.
낯 익지만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누군가와 함께 타야하는 엘리베이터는 굼벵이처럼 동작이 느리다. 쓸데 없이 등교를 서두르는 초교생이 5층에서 올라탔고, 허씨가 내벽에 붙은 '탑승시 유의사항'을 인내심 있게 재차 읽는 동안, 드디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닿았다. 오늘도 아파트에서 빠져 나오는 과업을 무사히 수행한 셈일까?
힘든 엘리베이터. 앞으로 그놈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나는 날엔 다소 목청을 높여 이렇게 말해보자.
'안녕하십니까?'
曺斗鎭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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