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
온 생애를 거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다. 민족교육의 요람인 정주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그는 철학과 불경, 유교, 동양경전, 주역, 성경, 천문, 지리에 통달한 당대의 천재였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 공적인 활동을 일체 하지 않고 은둔하며 산 탓에 그의 이름보다는 함석헌의 스승으로 세상에 더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성천문화재단 다석사상 연구위원인 박영호씨가 스승인 다석의 사상을 집약한 사상전집 '진리의 사람-다석 류영모'(두레 펴냄.전2권)를 펴냈다. 일생 동안 진리의 구도자로 살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한 한 인간의 궤적을 밟아간 이 책은 위대한 정신적 스승의 삶과 사 상을 통해 삶의 지침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깨우침과 용기를 주고 있다.
다석은 16세에 기독교에 입신했지만 불교와 노장(老莊), 공맹(孔孟)사상을 두루 탐구해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나(自我)가 죽어야 얼(靈我)이 산다'는 것을 깨달은 인물이다. 나를 없이하는 길은 삼독(三毒)의 탐(貪).진(瞋).치(痴)를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탐욕의 뿌리인 식욕을 버리기 위해 하루에 한 끼만을 먹었고, '진에'의 뿌리인 미움을 버렸으며, 치정의 뿌리인 색욕을 버리기 위해 해혼(解婚)하여 부부가 남매처럼 지냈다.
20세기인 성인인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를 존경한 다석은 성(性) 이외에 남녀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죄악시했다. 때문에 간디처럼 52세에 아내와 해혼해 방에 긴 책상을 놓은 채로 지냈다. '저녁 석'(夕)자가 3개가 모여 있는 다석(多夕)을 호로 삼은 이유도 하루에 세 끼 먹을 것을 한데 몰아 저녁에만 먹었기 때문. 그의 일식(一食)주의에 영향을 받은 함석헌 김흥호 서완근 박동호씨 등은 평생 일일일식 (一日一食)을 실천하기도 했다. 이렇게 삼독을 극복함으로 초월적인 세계(절대진리)로 나아가자는 것이 다석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다석은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았다. "어느 종교나 구경에 가서는 진리 되는 하느님을 나의 참 생명으로 믿고 받들며 따르는 것은 같다"고 말했다. 서구신학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 70여 년 전에 이미 그 이치를 깨달아 종교의 길에 다양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는 또 우리말을 갈고 닦아야 한다면서 한글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독특한 순 우리말을 발굴해 쓴 그는 여름질(농사), 씨알(민.民), 마침보람(졸업), 알짬(정.精), 속알(덕), 빛골(광주), 몬(물.物) 등 우리말에 담긴 여러 뜻을 풀어내거나 새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함석헌 사상의 요체인 '씨'(民)이나 '빛고을'(광주) 등은 다석에 의해 나온 말들이다.
다석은 당대 지식인인 최남선, 이광수, 정인보, 문일평 등과 문우로 교유하며 폭넓은 사귐을 가졌다. 특히 그가 192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만난 함석헌이 그가 가장 아낀 제자였고, 무교회주의자인 '성서조선'의 김교신과도 깊은 만남을 가졌다. 남강 이승훈과도 신앙적인 입장은 달랐지만 서로 다른 길을 인정하고 깊은 존경심으로 교유했다.
"도라고 하는 것은 욕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무욕이다. 욕심이 없는 상태를 무(無)라고 한다. 무가 되어야 진리의 세계를 살 수 있다"는 것이 다석의 가르침이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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