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77차 문제

문제 : 현재의 세계 질서는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다국적 기업이나 거대 자본은 약육강식의 경제 제국주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민족이 대응해야 할 방법으로 민족주의가 가진 폐쇄성과 배타성은 필요하기도 하고 문제가 되기도 한다. 다음 제시문을 참고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를 논증하라.

사회 : 임선생님은 제3세계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시더군요. 저항적 민족주의 안에도 억압성과 배타성이 내장되어 있다는 이야긴데, 김동춘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 : 모든 민족주의 안에는 억압의 싹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소외와 억압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 다시 말해 억압이 개별화되지 않고 민족 단위로 집단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자칫 억압적인 질서를 용인하게 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임 : 저라고 식민지 시대에 저항적 민족주의가 가졌던 진보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제가 있습니다. 우선 식민지 시대라고 민족적인 억압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계급적인 억압이나 사회 문화적 코드로서 존재하는 신분적인 억압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죠. 성적인 억압도 있습니다. 결국 식민지의 모순은 중층적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해방이라는 것도 중층적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어야 합니다.

김 : 제 생각은 다릅니다. 식민지 말기의 정신대 문제를 예로 들어볼까요?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대부분은 힘도 없고 못 사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 여성 문제가 중첩됩니다. 유념할 점은 민족주의란 대단히 정치적인 운동이라는 것이죠. 다양한 억압과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존재하긴 했지만, 결국 일차적 규정력은 일제의 강점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항상 '주적'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민족성과 억압성은 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1945년 이전에 그러한 방식의 저항이 아니라 복합적 실천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봅니다.

임 : 글쎄요.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구분하는 것도 타당합니다만. 그러다 보니 한국의 민족주의가 정신대 여성들에 가한 억압이 간과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문제를 좀더 현재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왜 정신대 피해여성들이 해방후 50년 동안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가 힘을 행사하고 있어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저항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근대성과 민족주의의 문제입니다. 이화여대에 있었던 김활란은 친일파였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대적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여성들이 전통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한 사람입니다. 제 말은 민족이라는 틀 안에 여타의 문제들을 종속시켜 왔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사회의 결' 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아무리 혁명적인 변화라 하더라도 사회의 미시적인 결이 바뀌지 않는다면 피상적인 변화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사회 : 그렇다면 임 선생님은 해방 이후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겠군요. 김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 : 저는 흔히 지적되는 한국인들의 폐쇄성이나 자민족 중심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임 선생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죠. 국가주의는 권위 의존적 인간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시민의식의 성숙을 가로막습니다. 이것은 결코 역사문화적인 차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문제가 아닙니다. 임선생 시각으로 본다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양면성, 요컨대 정치권력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히 폐쇄적인 한국인들의 이중성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습니다.

임 :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경계가 그렇게 뚜렷한 것인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저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하나의 담론구성체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이나 북이나 혈연과 같은 원초론적.객관적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민족을 역사적 변수가 아닌, 초역사적 상수로 보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핏줄이라는 요소가 개입하면,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배타적인 성격을 띠기 마련입니다. 핏줄이 다른 사람, 언어가 다른 사람은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대단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한국에서 국가주의적 동원 기제가 가능했던 것도 결국엔 담론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김 : 저는 핏줄 같은 원초적 요소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부분적 자원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원의 기제로 활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권력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동포' 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동원의 수사로 등장한 것은 60년대 박정희에 의해서입니다. 북한에서 '핏줄론'이 등장한 것도 70년대입니다. 이러한 예들은 혈통이라는 민족주의의 특정한 자원을 동원하고 강화한 것이 다름 아닌 국가권력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