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재해교수가 새로본 신명과 해방의 노래 '우리민요;

◈(8)집집마다 복을 빌어주는 지신밟기 소리

대보름날 여성들이 놋다리밟기를 하면 남성들은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는 풍물잡이들이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찾아가서 집안에 자리잡고 있는 각종 신들을 달래고 섬기는 굿을 함으로써 집안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의적 의식이다. 지신밟기 소리는 상쇠가 장단을 멈추고 앞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잽이들은 장단을 치며 뒷소리를 받는 선후창 형식을 이룬다.

어허라 지신아 성주지신을 눌리세

붇구세붇구세 다래기다래기 붇구세

한 마지기를 붇구까 두말지기를 붇구까

앞노적을 붇구까 뒷노적을 붇구까

안동 풍산 유장학 어른의 소리다. 붇구세란 사투리가 '불려 주세'라는 표준말보다 더 실감난다. 가장 일차적인 소망이 경제적 풍요이다. 농사가 잘 되어서 노적가리도 불어나고 논밭전지도 불어나게 해 달라는 것이다. 농부들이 가장 기대하는 소망이 바로 풍년이자 넓은 농지의 확보이다.

아들애기 낳거덩/ 나라에는 충신동

부모께에 효자동/ 형제간에 우애동

붕우간에 유신동/ 그런 아기를 점지하소

명을랑은 동박석/ 재줄랑은 제갈량

복을랑은 석순이복/ 그런 아기를 점지하소

거창 이석기 어른 소리이다. 농사 중에는 자식농사가 최고라고 했으니 지신밟기 하면서 자녀들의 복을 빌지 않을 수 없다. 나라에는 충신이 되고 부모께는 효자가 되며 형제간에는 우애 있고 친구들 사이에는 신의가 있는 자녀를 소망한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도덕성을 다 갖춘 다음에 비로소 수명은 동방삭처럼 장수하고 재주는 제갈량처럼 총명하며 복은 석숭처럼 많기를 빈다. 개인적 성취보다 사회적 헌신을 먼저 비는 태도가 눈길을 끈다.

◈천석이나 늘리소 만석이나 늘리소

사회에 이바지하는 윤리적인 봉사형 인간보다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이기적인 출세형 인간을 기대하는 요즘 어른들의 가치관과는 자못 다르다. 빵을 주면서 친구와 나누어 먹지말고 혼자 다 먹으라고 당부하는 것이 요즘 부모 아닌가.

중고등학교 시켜서/ 대학교도 시켜서

대학원까지 시켜서/ 박사징을 따고서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요즘에 새로 만들어진 지신밟기 소리는 출세형으로 치우쳐 있다. 도덕적인 내용은 없는 가운데 "금메달도 따고서/ 그것뿐만 아니라/ 그 가정에 자라나/ 장관사우도 볼 수 있고"하여, 딸이 박사학위를 받고 금메달도 따고 장관 사위까지 보기를 기원한다. 출세 지향적이 아니면 만석꾼 같은 부호가 되기를 기원한다. "천석이나 누르소/ 만석이나 느루소/ 이 집 재산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이 부흥해/ 아시아에 제일가는" 나라를 꿈꾼다. 재산이 천석꾼 만석꾼이 되도록 늘여 주는 것은 물론, 나라도 부국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지신밟기 소리는 으레 성주풀이와 만난다. 집안 최고의 신이 성주신이기 때문이다. 성주의 본향인 안동 제비원의 솔씨가 성주목으로 자라고, 대목들이 연장망태를 둘러메고 톱질을 하며 집 짓는 과정을 차례로 노래한다.

학의 등에 터를 닦아/ 용에 머리에 주추 곱고

호박아 주추 유리 지둥/ 학이야 능청 서왔구나

경주 안강 진석일씨 소리이다. 풍수지리적으로 학의 등에 터를 닦고 용의 머리에 주추를 놓았는데, 그 주춧돌이 바로 호박(琥珀)이며 그 위에 세운 기둥은 유리기둥이다. 아방궁처럼 화려한 궁전을 세운 셈이다. 방치장은 또한 어떤가.

방치장 귀경하소/ 오동장롱 벽계수야

자기하고 반다지/ 반다지야 빼다지야

일층이층을 얹어놓고/ 방치장이사 했건마는

방 치레는 곧 가구 치레이다. 오동나무 장롱에다 자개 박은 반다지를 갖추어 이층을 얹어놓았으니 이만 하면 족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껍데기 방 치레이다. 진짜 방 치레는 방을 쓰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그 방 주인인가에 따라 방의 수준이 달라진다. 아무리 고급 가구로 장식해 두어도 방 주인이 시원찮으면 사람들이 모두 그 방을 우습게 안다. 비록 조촐한 방이라도 방 주인이 대단하면 모두 그 방을 선망하며 방 앞을 지나칠 때조차 삼가게 마련이다.

여기 앉고 저기 앉아/ 소학맹자를 읽었나

공자맹자를 읽었나/ 이집 자식 활발하다

이 집 짓든 삼년만에/ 아들애기 놓그덜랑

"국회의원을 점지하소" 전통적인 집치레에서 선비처럼 공부하는 사람 치레로 가다가 어느덧 국회의원으로까지 비약해 버렸다. 집은 방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부엌도 있고 마루와 뒤주, 장독대, 외양간, 뒷간 등도 있어야 한다. 뒷간은 어떤가.나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빈소에 한번 갈 때는

깨끗한 곳이라고 볼 수 있어/ 매일 먹고 나면은

뱃속이 점점 나빠서/ 화장실에만 가면은

아픈 배가 간곳 없고/ 그게만 가서 앉이면

의원도 필요 없구서/ 모든게 필요 없네

거창 남석규 어른 소린데, 뒷간의 기능을 절묘하게 나타냈다. 뒷간을 더러운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뒷간이야말로 깨끗한 곳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뱃속의 나쁜 것을 뒷간에 가서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만 잘 누면 아픈 배도 간 곳 없고 의원도 필요 없으니 뒷간만큼 좋은 데가 어디 있을까. 변비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의학상식은 꿰뚫고 있는 셈이다.

일가 중에는 화목지신

이리부모님 위로하여 이이성취로 화목하자

삼재팔난은 물알로 삼백 육십 일 하루같이

사해사시로 하루같이 사방재수로 모아들여

경주 외동 김혜순 할머니가 앞소리를 메기니 뒷소리꾼들은 "여기하사나 지신아 지신아 밟자 성주야" 하고 후렴을 받았다. 사설의 첫마디가 숫자 일, 이, 삼, 사로 시작되는 규칙성이 있다. 숫자뒤풀이 형식으로 지신밟기 소리를 메긴 것이다. 이렇게 십과 백이 끝나면 "천세천세 천천세 만세만세 만만세 억조만석을 불어주자"며 숫자가 억조까지 과장된다. 과장하여 기원을 해야 주술적 효과가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패거리 전략은 정치주술일 뿐

지신밟기는 주술적 사고에 의한 신앙행위이다. 정치도 지신밟기처럼 '붇구세 붇구세'로 나가거나 '만세만세 만만세'를 부르며 억조만석을 기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치는 주술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패거리 늘리기에만 골몰하고 있다. 여당 총재는 자민련과 공조를 못해 안달을 하다가 전대미문의 의원 꿔주기를 하고, 야당 총재는 3김청산을 외치다가 김영삼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는가 하면, 그간의 방침을 바꾸어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인정하였다. '김영삼은 껴안고 김종필은 끌어들이기'를 한다는 논평이 나올 만하다.

여야 모두 새로운 정책 제시보다 패거리 확장에만 골몰하는 것은 그것만이 다음 집권의 관건으로 믿는 탓이다. 낡은 정치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오히려 민심을 잃는 일이나, 개혁정책 수립과 정의로운 지도력, 인간적인 신뢰성 확보가 민심을 얻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 패거리 붇구는 술수만 부린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는 아직 지신밟기와 같은 주술 단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때묻은 사람 붇구기보다 참신한 지도력 발휘를 촉구하는 나라지신이라도 밟아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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