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이경자-소설가)

결혼해서 자식 둘을 두었는데 성인이 되었다. 그 아이들이 어린이였을 때, 우리 부부는 '어린이 날'이 법석을 떠는 날이었다. 미리 아이들의 선물을 장만하고 나는 새벽에 일어나 어제 준비해둔 재료로 김밥과 샌드위치를 만들어 점심보따리를 싸고 남편은 운전을 해서 어딘가로 나가야 했다. 어린이 놀이터나 동물원이 있는 길은 진입로가 주차장이 되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망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런 법석도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면서 남의 일이 되었다.

올해도 어린이날은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휴일이었다. 며칠 후에 어버이날이 돌아왔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엄마아빠가 함께 읽을 편지와 선물을 담은 상자를 주었다. 엄마아빠가 함께 쓰는 2인용 찻잔이었다.

아이들이 편지는, 한결같이 잘 키워주셔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아이들을 키웠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한 일은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킨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정신적으로 성장시켰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내가 알지 못하던 내 성장기를 돌아보게 되었고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을 이해하고 또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불효를 뒤늦게 깨닫게도 해줬다. 이렇듯 아이들이 내 정신을 키워 준 것에 비하면 내가 자식들에게 한 일은 너무 작다. 아이들은 다시 어버이가 되어서 나와 같은 과정으로 자식들에게 배울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자식에게 노년을 의탁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미리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후연금도 들고 저축도 하면서 자식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길러주기만 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부양'의 책임을 기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더 많이 받고 살기 때문에 특별히 '받아야' 할 것이 없다. 더군다나 부모가 자식을 한창 기르는 나이가 혈기가 왕성한 때여서 내면의 성찰이 부족하기 쉽다. 아직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자식에게 상처를 주어 업(業)을 만들기도 하고 자식은 그것에 얽매여 오래도록 허우적거리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사랑을 알고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기에는 적어도 쉰 살은 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손자손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의 달에 내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다. 우리가 어느 집이나 어느 가족이나 대게 겉에서 보면 다 비슷비슷하다. 우리 집도 그렇다. 그러나 아직 우리 집엔 우울한 사람 하나가 있다. 바로 나다. 오늘도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아침 준비를 했다. 그 사람이 만족스러운 식탁을 차리면 좋아하고 좀 성의가 없어 보이면 금방 실망하는 기색이 보인다. 저녁에도 대게 그렇다. 가능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밥상을 준비하려고 하고 그가 만족하면 나도 기쁘다. 그런데 그는 직장이 바깥에 있어 출퇴근을 하고 나는 소설가이니까 집에서 주로 일을 한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의 일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는 사람은 없다. 이런 불공평에 대해 화가 나고 우울하다. 몸이 고단하지 않을 땐 모르겠다가 피로가 쌓이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나이 오십 넘은 남자들은 부부관계의 '평등'에 백치일 수밖에 없다고 이해는 한다. 그러나 모든 관계의 아름다움. 혹은 안정은 균형에서 온다. 평등까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 사랑은 그런 것이다. 맞벌이 아내인 나. 가정의 달에 맞벌이 아내들의 해묵은 숙제인 '가사노동의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글을 맺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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