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 5월은 학교마다 졸업 앨범 제작을 위해 업체를 선정하는 시기. 특히 올해는 특정 업체와의 상투적인 수의계약 관행을 바꾸기 위해 학부모.교사들이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입찰을 추진하는 등 분주하다. 앨범을 값싸고 질좋게 만들려는 움직임이 여러 학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어떻게 바뀌고 있나?=대구에서 가장 앞서 앨범 공개 입찰을 실시한 학교는 와룡중. 지난해 학교운영위에서 학부모 3명, 교사 2명으로 앨범 소위를 만들어 자료를 수집하고 시장 조사를 하는 등 철저히 준비, 입찰을 시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 전 해에 3만800원이던 앨범 값이 2만2천원으로 낮아졌다. 그런데도 앨범 크기는 더 커졌고, 표지.속지의 질도 향상됐다. 학급당 4면씩 총 66면이던 두께는 2배(130면)로 두꺼워졌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은 고입 원서용 사진 10매 및 자기 사진이 들어간 열쇠고리 등을 선물로 받았다. 업체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 20명에겐 무료로 앨범을 줬고, 이익금의 10%는 결식학생 돕기 성금으로 내놨다.
월곡초교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작년에 학교운영위가 입찰제를 도입하려 하자 기존 업체가 먼저 백기를 들고 나섰다. 3만8천500원 받았던 값을 품질은 꼭같이 하면서도 2만1천원에 계약하겠다고 제의한 것. 담당 교사는 "그래도 올해는 공개 입찰을 도입해 가격은 조금 높아지더라도 품질을 대폭 향상시킬 계획"이라고 했다.◇올해 움직임=성과가 소문나자 올해는 공개 입찰제를 도입하려는 학교가 크게 늘었다. 다음달 초까지 적어도 대구에서 20개 이상의 학교에서 입찰이 이뤄질 전망. 전교조 관계자는 "앨범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업체들이 입찰에 뛰어 들고, 조합 가입 업체들도 분열 조짐을 보이면서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실시됐던 경북기계공고 공개입찰 경우, 11개 업체가 경쟁하더니 겨우 2천500원에 낙찰되는 특이한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다. "당장은 손해 보더라도 학교.학부모 등의 신뢰를 얻어 장기적으로 수익을 올리겠다는 작전 아니겠느냐"고 주위에서는 해석했다.
앨범 공개입찰은 참교육 학부모회, 전교조 등이 학교운영위 핵심 사업으로 지정해 주도하는 사업. 교복 공동 구매와 함께 올해 학교 운영에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장, 기존 거래 업체 등과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성과가 커 확산일로에 있다. 전반적으로 봐, 지난해 일부 학교에서 시작된 관행 바꾸기 덕분에 가격이 20~30% 낮아진 것은 물론 품질까지 높이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무엇이 걸림돌인가?=비닐 코팅 표지를 넘기면 어색한 표정의 증명 사진들, 뻣뻣하게 어깨 높이를 맞춘 단체 사진, 소풍.수학여행 같은 그렇고 그런 학교 행사들 모습… 어느 가정이든 한두권쯤 가지고 있을 법한 낡은 졸업앨범의 전형이다. 그러나 근래 만들어진 졸업앨범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때문에 요즘 학생들은 "촌스럽다"고 아우성. 졸업 후 세월이 흐른 뒤 생각날 때마다 꺼내볼만한 '보물'로는 자격미달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질조차 별로 나아진 것 같잖은데도 가격은 비싸졌다는 점 때문에 불만이 더 많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을까? 교사.학부모 등은 앨범 제작업체 선정 관행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작년에 공개 입찰을 실행에 옮겼던 초교의 한 교사는 "거의 모든 학교가 앨범인쇄조합 소속 업체들과 수의.조달 계약을 하는 것이 한계"라고 했다. 경쟁이 없다보니 값이 낮아지거나 품질이 향상되기 힘들다는 것.
"업체들이 학교측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격.품질 문제 제기를 차단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해 대구에서만 30여개 학교에서 앨범 공개 입찰이 추진되고 있지만 교장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계약 책임자가 자신이어서 잘못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한사코 말리지요. 입찰에 붙이면 가격이 싸지고 품질은 나아지는데 무슨 책임이 있다는 건지…" 전교조 대구지부 관계자는 답답하다고 했다.
또 많은 교장들은 다른 핑계를 댄다고도 했다. "오래 전에 있은 수학여행이나 행사 등의 필름을 구하려면 업자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조달청 가격에 따라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
◇남은 과제=관행 파괴에 앞장서 온 교사들은 "내년에는 대다수 학교에서 공개입찰이 실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개 입찰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이미 일부 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내고 있으니 다른 학교나 교육청이 주목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운영위가 입찰을 추진하는데도 공연히 말리고 나서다가는 교장조차 업체와의 결탁 의혹을 받기 십상이라고도 했다.
교육청 역시 변화 사례를 수집.분석,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경남도 교육청은 이미 학교운영위 심의를 통해 값싸고 질좋은 앨범이 제작되도록 하라고 시달한 바 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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