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대문명을 찾아서

◈(2)떼오띠와깐-신이 만든 도시

제1차 답사 지역인 떼오띠와깐(Teotihuacan)의 피라미드군은 멕시코시티 북쪽 약 50㎞ 되는 곳에 있는데, 기원전 150년에 건축되기 시작한 신대륙 최대의 도시국가였다. 이 거대한 피라미드 도시를 건설한 것은 '떼오띠와깐'이라 불렸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떼오띠와깐은 멕시코 분지를 중심으로 200~500년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절정기의 떼오띠와깐은 넓이가 23.5㎢, 인구가 20만명으로 세계적으로 로마, 장안(당나라 수도) 다음 가는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 떼오띠와깐이 550~650년 즈음에 멸망하고 말았다.

폐허가 된 이 도시국가를 12세기경 멕시코 중앙부에 등장한 아스떼까인들이 찾아냈다. 고대인이 근대 고고학 성립 이전에 고대문명의 자취를 찾아낸 최초의 예가 아닐까. 장엄한 피라미드군으로 된 떼오띠와깐을 찾아낸 아스떼까인들은 이곳을 '신이 만든 도시'라 믿고, 그들의 우주관인 '태양과 달의 신화'의 무대로 삼았다. 장대한 우주관에 기반한 떼오띠와깐은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계획된 유적으로 유명하다. 이 유적의 축은 중앙을 남북으로 달리는 '사자(死者)의 길'이라는 대로이다. '사자의 길'은 7, 8세기에 만들어진 당나라 장안성, 발해 동경성, 일본 평성경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연상케하였다.

'사자의 길'이라는 명칭은 아스떼까인들이 길 좌우의 늘어선 석조 건축물들을 무덤으로 생각하고 붙였다. 그러나 발굴 결과 생활공간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이 도시에 살았던 떼오띠와깐들은 이 도로를 '사자의 길'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산자들의 거리'가 '죽은 자들의 거리'로 이름이 붙여진 것, 어쩌면 몰락해버린 떼오띠와깐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남북으로 달리는 '사자의 길'에 연해서 20기 이상의 신전 피라미드가 건설됐지만 압권은 '해의 피라미드'였다. '해의 피라미드'에 가기전 안내원을 따라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성채'(시우다데라)라고 불리는 대광장부터 답사했다. 한변의 길이가 400m인 사각형의 대광장은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제의 공간이었다. 횃불을 든 엄청난 숫자의 군중들은 어떻게 마이크 시설도 없던 당시에 제사장의 말을 듣고 움직였을까 궁금하던 순간, 신전 가에 섰던 안내원이 박수를 쳤다. 이 소리는 공명되어 멀리까지 울려퍼졌다. 이 공명의 원리를 이용하여 제사장은 10만명의 군중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던 것이었다.

성채의 대광장 동편에는 '깃털 달린 뱀의 신전'(께살꼬아뜰 신전)이 있다. 한변 65m, 높이 20m인 이 신전은 떼오띠와깐에서 세번째 큰 건축물로 으뜸가는 장식미를 자랑한다. '해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가 수직성과 체적을 강조하는데 반해 '깃털 달린 뱀의 신전'은 수평성이 두드러졌다. '깃털 달린 뱀의 신전'은 이름처럼 깃털이 난 뱀이 조각돼 있는데, 발굴 결과 200명이 넘는 사람이 순장되었음이 밝혀졌다. 건조한 자연환경은 이들로 하여금 비를 상징하는 뱀신을 만들게 하고, 산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비를 기원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종교적 염원속에 행해진 이러한 순장행위는 무덤에 많은 사람을 순장한 가야시대의 풍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한변 최대 225m, 높이 65.6m, 체적 약 100만㎡에 이르는 '해의 피라미드'는 세계 최대급의 건축물이다. 계단을 통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전 꼭대기에 올라가니 밑의 관광객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연 2회, 태양이 이 피라미드의 바로 위에 오는 날이면 후광이 비치듯이 빛나는데, 이 피라미드의 내부에는 오래된 신전이 묻혀 있다.

'사자의 길' 북단에는 '해의 피라미드'와 짝하는 높이 46m의 '달의 피라미드'가 있다. '달의 피라미드'는 지반이 높아 고도상으로 '해의 피라미드'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물의 여신상'은 이 신전이 비와 풍요를 기원하는 신전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신전을 중심으로 '사자의 길'이 남쪽으로 곧게 뻗어있었고, 바로 앞 광장의 양편에는 규모가 작은 신전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 도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구조는 이 '달의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짜여졌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해의 피라미드'를 이 도시의 중심으로 서술한 기왕의 견해들은 재고돼야할 것이다. 아마 '해의 피라미드'는 이 도시의 새로운 지배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동쪽에 별도로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이 도시에는 단층(1층) 건물에 여러 개의 방을 배치한 '아파트식 건축물'도 있었다. 이런 건물들은 약 2천기를 헤아리고, 그 가운데는 176개의 방이 있는 아파트도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공동체적 생활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개별가호보다 공동체를 선호했던 떼오띠와깐은 흑요석 산지가 가까이 있었고, 멕시코 분지의 동쪽과 남쪽을 잇는 교역로상에 위치하며, 저습지를 이용한 관개농경을 통해 국가를 강성하게 키웠다.

따가운 햇볕속에 3㎞ 이상을 걷고, 높은 신전들을 오르내려 무거워진 다리를 이끌고 '달의 피라미드' 서편에 있는 '께살빠빨로뜰' 궁전으로 갔다. '께살빠빨로뜰' 궁전은 '달의 피라미드'에서 제례를 관장하던 신관의 주거지로 추정되며, '께살빠빨로뜰' 궁전에는 '재규어'(하과레스) 궁전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

께살빠빨로뜰 궁전의 기둥 등에는 뱀과 신화상의 동물인 고양이과 동물을 모티프로 한 화려한 조각과 벽화가 그려져있다. 벽화는 떼오띠와깐인들의 솜씨와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인데, 사용된 안료는 전부 자연 염료였다. 안내인은 선인장에 붙은 흰색의 곰팡이에서 붉은 색의 안료가 얻어지는 과정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선인장으로 술을 만든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안료채취에 선인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처음 보는 사실이었다.

신전과 궁전 등의 거대한 건축물과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들은 놀랍게도 금속기를 사용할 줄 몰랐던 석공들이 석제 도구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떼오띠와깐 사람들은 천문관측을 통해 달력을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학적 지식을 축적하여 정밀한 설계도가 만들었다. 고도의 수학적 지식과, 정교한 건축 설계기술과 뛰어난 석공기술, 그리고 수많은 민중들의 힘을 모은 정치, 종교의 힘, 이것들의 합작품이 바로 떼오띠와깐 유적으로 우리곁에 남아있다.

글 : 노중국 (계명대 교수)

사진: 최종만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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