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농장의 고려인들-초기엔 굴속에서 짐승처럼 살았죠
철의 실크로드를 쫓다 보면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그중에서도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의 모습은 가슴 아픈 단편이 아닐 수 없다. 타슈켄트에 도착한 취재팀이 시내에서 10㎞가량 외곽에 위치한 두스트릭크 집단농장을 찾은건 오후 1시께였다.뽕나무가 밭의 경계를 이루며 줄지어 있고, 집집마다 짚단이 마당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러시아어로 '친선'을 뜻하는 '두스트릭크' 집단농장은 1937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집단 이주해온 고려인 12가구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엔 1천600여명 농장원 중 고려인은 100여명 뿐이고 특히 이주 1세대는 5명밖에 남아있지 않다.이들의 이주는 스탈린의 소수민족 분리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이주했을때 갈대밭 뿐이었습니다.당장 비, 바람을 피할 공간이 없어 구덩이를 파고 갈대를 꺾어 집을 대신했어요.정말 짐승같이 살았습니다".
집단농장 노인정에서 만난 이주 1세대 정희선(80)씨는 한국말로 당시 상황을 거침없이 설명했다. 이주전 그가 살던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80㎞가량 떨어진 파시예트라는 작은 농촌 마을이었는데 두만강을 끼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까지 오는데 한달 이상 걸렸습니다.40량 정도되는 화물열차였는데 한칸에 보통 4가족씩 20여명이 탔어요.10월이라 몹시 추웠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 아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열차가 멈추면 부모들은 죽은 아이를 근처에 묻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열차는 갈대밭에 정씨 일가를 비롯해 12가족을 부려놓고 떠나 버렸다.
"하바로프스크를 떠나기전 곡간에 있던 곡식을 꺼내 떡을 만들고 가축도 잡아 준비를 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모두 굶어 죽을뻔 했습니다.배급이 있긴 했지만 형편 없었거든요".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소련 당국이 집을 지어줬고 이듬해부터 황무지를 개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 남자들은 모두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으로 끌려가고 말았다.이른바 노력전선에 동원된 것이었다. 이 바람에 30세가 넘어서야 결혼했다는 정씨는 지금 아들 2명과 함께 이곳에 살고 있다.정씨는 취재팀을 부여잡고 서울에 '안'씨 성을 가진 친척이 살고 있는데 찾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 농장에 사는 이주 1세 고려인중 최고령자는 98세, 하지만 한국에 가본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보니 죽기전 한국땅을 한번 밟아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다. 두스트릭크 집단농장엔 연간 6천300㏊의 농경지에서 목화 3천t, 밀 7천600t이 생산되고 있다. 집단농장 자혼길 무푸치자데 부회장은 "최초 우즈베키스탄에는 집단농장이 50여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15개만 남았다"면서 "특히 이주 1세대인 고 박경조씨는 1960년대초 '경조미'란 품종을 개발했는데 아직도 우즈베키스탄에서 최고의 쌀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1937년 한해동안 모두 124대의 화물열차로 3만6천442가구, 17만1천781명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으며 그중 7만5천여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됐다.
김기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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