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모판서 잡나락 걱정하는 모찌기 소리
'모 농사가 반 농사'라는 옛말이 있듯이 농사일 중에서 모 농사가 제일 중요하다. 모판을 잘 가꾸고 본 논에다가 모내기를 제때 마치면 '반 농사'는 지은 셈이다. 정치 농사도 마찬가지이다. 정치판에서 사람을 잘 기르고 또 잘 가려서 뽑아 쓰면 정치 농사의 절반은 성공이다. 지금 우리 정치는 바닥을 헤매고 있다. 민심은 벌써 떠났는데 여전히 수구세력들과 골프장에서 짝짜꿍이나 하면서 낙하산 인사로 감투 나누어 쓰기에 골몰하고 있다. 갈수록 군부세력이 득세하는 걸 보면 정권교체가 아니라 사실상 정권교잡이 판을 치고 있는 셈이다.
새 모판에서 새 품종의 모를 쪄다가 논에다가 심어야 벼농사가 잘 될 터인데, 수구세력의 모판에서 피인지 벼인지 알 수 없는 모를 마구 옮겨 심고 있다. 그 결과 모가 자랄수록 벼논이 아닌 피논이 되고 있다. 정치모판을 두고 보면, '잡나락이 절반'이라는 모찌기 소리의 탄식이 남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떴네 해가 떴네/ 임의 창에도 해가 떴네
일어나소 일어나소/ 잠든 임아 일어나소
개똥밭에 양애잎은/ 이실로 깰 줄 모리더라
남의 집에 며늘애기/ 눈물 갤 날도 전히 없네
모내기 날이 밝으면 한 머리는 못자리에서 모찌기를 하고 다른 머리는 모내기 할 논에다가 물을 대고 논을 갈아서 써레로 삶아야 한다. 모찌기가 끝나면 모춤을 논으로 운반하여 모내기를 시작한다. 하루만에 이 세 가지 일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연히 모찌기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다. 농번기에는 일도 고된 데다가 매일 아침 어둑새벽에 일어나므로 아침잠이 부족하다. 곤하게 자는 사람을 깨우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다.
아직 개똥밭에 나 있는 풀잎의 이슬도 깨지 않았다. 이슬이 깬다는 것은 이슬이 여명을 받아 은구슬처럼 빛날 때를 말한다. 그것은 곧 이슬이 눈뜨는 때이자 잠에서 깨는 때이다. 캄캄할 때 일어나면 이슬도 깰 줄 모르지만, 고된 일과 속에 시달리며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들의 눈가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다. 그러나 일터에 나가면 사정이 다르다. 풋잠이나마 자고 난 뒤라 기운도 나고 해가 뜨지 않아서 덥지도 않으니 힘이 닿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한다.
이 논자리 거마리 배를/ 정신 없이 몰아를 불세
옆눈 주어 보는 저 각시/ 뉘에 간장을 다 녹이자고
진도 손판기 어른의 앞소리이다. 일이 힘들 때는 바다 같은 논자리인데, 새벽일이라 거머리 배처럼 좁은 논자리로 인식된다. 그러니 정신 없이 몰아서 일을 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젊은 각시가 살짝살짝 곁눈질을 한다. 그 고운 눈길에 남정네들 간장이 다 녹는다. 간장이사 녹으나마나 일손에 신명이 오르니 그만이다. 뭉치세 뭉치세 이 못자리를 뭉쳐 보세
얼른 일라 뭉쳐놓고 닷 마지기 자리 놀러나가세
이 못자리를 건뜻 뭉쳐 내놓고서 샛밥 먹세
샛밥번도 먹지마는 막걸리가 먼저 와야지
막걸리 한잔 들으시고 담배 피우고 일을 하세
충남 연기가 고향인 김지섭 어른이 조천수 어른과 주고받으며 부른 노래이다. 모판에 모를 빨리 쪄서 모춤을 들어내 놓고 닷 마지기 논으로 모내기하러 가자고 재촉한다. 아침나절에 힘이 날 때 하는 소리다. 모를 얼른 쪄내 놓고서 새참을 먹자고 격려한다. 그러면 새참을 먹기 전에 막걸리 먼저 마시자고 거든다. 서둘러 모를 찌면 막걸리도 마시고 담배도 한 대 피우며 쉬었다가 할 수 있다고 당근을 들이댄다. 그러나 한나절이 지나고 몸이 지치면 모를 얼른 찌라고 신명을 돋울 수도 없다.
이 모자리 이와내세
저승차사 이 맹추야
이 모자리 훔치 가세
성주 사는 이만숙 할아버지 소리다. 모 찌는 일을 부추기다가 결국은 못자리를 원망하며 저승차사가 못자리나 저승으로 훔쳐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승차사가 그럴 리가 없으니 마침내 맹추 같은 저승차사야 이 못자리를 훔쳐가라고 막말까지 한다.
이 논에라야 모를 부어/ 모 쪄내기 난감하다
총각방에야 처녀를 잃고/ 처녀빼기 난감하다
하동 사람 정봉석 어른 소리다. 모를 찔 때가 되면 비로소 못자리할 적 생각난다. 엉뚱한 논에다 볍씨를 부어 못자리를 하게 되면 그만큼 모찌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총각방에 잘못 가서 처녀성을 잃고 나면 처녀로서 더 이상 몸을 빼기도 어렵다. 한 번 몸을 주어서 처녀성을 잃고 나면 다음부터는 정조를 지키기 어렵다. '정조를 지킨 처녀는 많아도 한 번만 바람 피운 처녀는 없다'는 옛말처럼 말이다. 요즘 여당은 연정을 구실로 군부정권의 수구세력과 공공연히 야합을 하고 여론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낙하산 인사를 계속한다. 한번 부정한 짓을 하기 어려울 뿐 한번 하기 시작하면 그만두기 어렵다는 말이 딱 맞다. '악모 나락 모를 부어/ 잡나락이 반이로다/ 울타리 밖에 첩을 두니/ 첩의 자슥 반이로세' 하동군 손분순 할머니가 읊은 모판의 사정이나 지금 우리 정치판의 사정이나 다를 바 없다. 볍씨를 잘못 부어 잡나락이 반이고, 울 밖에 첩을 두는 바람에 첩의 자식이 반인 것처럼, 우리 정치모판도 같은 꼴을 보이고 있다.
에우자 에우자 이 종판으로 에우자
나무가래 쇠가래/ 얼른 잠깐 들어냄세
장기판마치 남은 종판/ 찌짐떡마치 남았구나
모찌기가 막바지에 이르면 '에우자'거나 '조리자'며 신명을 내서 마무리를 한다. 드디어 모판이 장기판만큼 남았다가 어느새 '찌짐떡' 만하게 남는다. 일을 끝내게 된 기대감에 들떠서 얼른 끝을 내자고 야단이다. 대통령 임기가 아직 3분의 1이나 남았는데도 정치인들이 자나깨나 대권논의를 하는 걸 보면, 마치 찌짐떡 만큼 남은 모판 다루듯이 임기말 권력누수를 즐기는 듯하다.
저 달이 떴다 산 넘어 간다/ 새 낭군 돌아왔다
오늘밤은 날 샌 줄 모르겠네/ 달이 차면 기운다네
권세 있다고 자랑마라/ 권불십년 세불백년인데
신안 사는 김정섭 어른 소리이다. 일을 하다가 보니 벌서 달이 지고 있다. 새 낭군이 돌아오는 날 밤은 사랑을 즐기느라 날 샌 줄을 모르기 예사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사랑도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권력은 길어도 십 년을 채 못 가고 나이는 오래 살아도 백년을 채 못 간다고 일깨워 준다. 그런데 청와대의 한 수석비서관이 기자들 앞에서 '권불십년'이라는 말을 하며 '정권을 잡으면 적어도 10년은 간다'고 했단다.
자의적 뜻풀이도 문제이지만, 세습왕조 시절에 이미 권력의 무상을 일깨웠던 말을 민주주의 시대에도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 민심이반이 심각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니 한심하다. 더군다나 정권연장의 속셈을 기자들 앞에서 발설하는 것을 보면, 한자읽기도 실패하고 역사의식도 없으려니와 민심조차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집권을 임기 이후까지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품을 수 있지만, 이를 언론을 향해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권력욕의 치부를 뻔뻔스레 드러내는 일이다. 열쇠를 잊어버리는 것은 기억감퇴이되 열쇠를 무엇에 쓰는지 모르면 치매라고 하는데, 요즘 청와대의 증세가 정치퇴행에서 정치치매 현상으로 악화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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