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조선중기 이후 영남사림의 양대산맥을 이뤘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의 탄신 500주년을 맞는다.
두 분은 동갑으로 퇴계선생은 경북 안동, 남명선생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 났다.
퇴계선생은 벼슬길로 나아가 좌찬성까지 올라 방대한 저술을 남긴데 비해 남명선생은 산림에 묻혀 대쪽같은 곧은 지조를 지키며 경(敬)·의(義)로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실천유학자이다.
최근 학계는 물론 경남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임진왜란사 재조명 작업과 함께 남명사상에 대한 연구 및 각종 기념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이로써 남명선생의 생애 및 학문과 사상, 유적지, 각종 기념사업 등을 알아 본다.
남명의 생애는 크게 유·청소년기의 서울시대, 청년기인 김해시대, 장년기의 합천시대, 노년기인 산청시대로 정리된다.
선생은 연산군 7년 음력 6월26일 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나 5세까지 살다 부친 언형(彦亨)의 문과급제로 인해 서울로 옮겨갔다.
26세 때 부친의 별세로 합천 삼가 선영에서 산 밑에 움막을 짓고 무덤을 지키는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28세 되던해 경남 의령 자굴산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한다.
선생은 30세가 되어 처가인 김해 신어산 밑의 탄동으로 이주,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곳에서 48세까지 18년간 학문에 정진하며 여러 선비들과 교유한다.
출생지 합천에서의 생활은 48세부터 10여년간으로 삼가 토동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많은 제자를 양성한 뇌룡정시대가 열린다.
이곳에서 선생의 기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암부(民巖賦)와 을묘사직소(乙卯辭職蔬)인 일명 단성소(丹城蔬)이다.
민암부에서는 백성을 물에 비유, 물이 노하면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로 민중을 크게 부각시켰다.
또한 을묘사직소에서도 당시의 나라를 '벌레가 백년 동안이나 나무 속을 갉아먹어 수액이 말라 곧 쓰러지게 된 큰 나무'에 비유해 당시의 폐단을 조목조목 통렬히 비판했다.
특히 대비 문정왕후를 궁궐안의 「과부」라 하였고, 임금인 명종을 선왕의 「고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 온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선생은 61세에 이르러 평소 보아둔 지리산 밑 산청군 시천면 덕산으로 옮겨 서실을 짓고 그 이름을 산천재(山天齋)라 했다.
이때 선생은 심성을 올바로 하는 것이 학자의 제일 공부임을 거듭 천명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척도로 경(敬)과 의(義)를 내세웠다.
평소 차고 다니던 2개의 경의검(敬義劍)에다 내명자경(內明者敬:안으로 밝힌다), 외단자의(外斷者義:밖으로 결단한다)라 새겨 학문의 표상으로 삼았다.
또한 만년에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려 경의사상을 도식화 하기도 했다. 선생은 72세인 1572(선조 5)년 음력 2월 8일, 퇴계선생이 떠난지 2년 후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남명사상은 곧 경·의를 토대로 문무를 겸한 실천정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으나 부산 등 경상좌도가 처참하게 유린되고 관군이 퇴패하자 선생의 문하생들인 영남의병장 3인(정인홍·곽제우·김면)과 많은 제자들이 경상우도인 합천·의령·고령 등지에서 의병 창의를 했다.
남명학파 의병창의는 곧 낙동강 방어선 구축, 곡창지대인 호남지방 진출 저지와 보급로 차단, 조정과 육·해상 군사력 정비 등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선생의 실천사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들어 선생의 탄신 500주년을 즈음해 학계에서는 「남명학연구」가 활발하다.
오래전부터 진주의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소장 허권수), (사)남명학연구원(원장 김경수)이 설립돼 기념사업회와 사상 체계연구를 해왔다. 최근 전국의 각 대학에서도 연구학과가 개설되고 심포지엄, 논문, 연구서적들이 쏟아지고 있으며 퇴계와 남명학을 비교연구하는 단계에 놓였다.
경남도는 「남명정신 경남정신」이라는 기치 아래 자치단체에 각종 기념사업과 복원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선생의 출생지인 합천은 늦게나마 8억의 예산으로 생가복원사업, 산청은 20억으로 기념관과 교육관 건립 사업을 서두러고 있다.
특히 합천 「남명선생선양위원회(회장 박우근)」에서는 안타깝게도 선생의 출생지에 삼가의 뇌룡정 외에는 아무런 유적이 남아있지 않아 생가와 계부당, 용암서원 등을 한 곳에 모으는 「남명공원」건립을 계획 중이다.
현재 남아있는 선생의 유적으로는 합천의 뇌룡정, 김해의 신산서원과 산해정, 산청의 산천재와 덕천서원 등이 대표적이며 나머지는 복원 계획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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