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대문명을 찾아서

(4)촐룰라유적-성당을 모자로 쓴 피라미드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건물을 부수더라도 식민지 시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도 했다. 그런데 나는 멕시코 촐룰라 유적지에서 이 말들을 다시 절감해야 했다.

2001년 1월 31일, 그날은 이동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식민도시인 뿌에블라를 지나 멕시코시에서 약 500㎞나 떨어져 있는 와하까주까지 가야 했다. 그래서 촐룰라유적은 시간이 좀 남으면 들르자던 곳이었고, 그곳에서 머물 수 있던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멕시코시에서 약2시간쯤 가자 먼저 산 정상의 흰색 성당이 보였다. 그러나 산은 그 자체 거대한 피라미드 유적이고, 성당은 그 위에 서 있는 건물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기원전 6세기경에 똘떼까인들이 이주해서 형성한 촐룰라 유적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눈 덮인 화산을 배경으로 하여 뿌에블라 평원에 서서 음미해야 한다. 이 신비한 유적에 도착하여 피라미드 정면을 통해 정상으로 올라가면, 성당에 이르게 된다.

'치유의 성모 성당'이라는 이 교회의 밑은 고고 유적과 함께, 현재 발굴해서 속 내부를 드러내는 제물의 광장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유적은 피라미드 길을 통하여 건축물의 내부까지를 드나들 수 있다.

이 유적은 길이가 400m, 높이가 65m나 된다. 그 안에는 비석과 제대 등이 있다. 건립 연대는 기원전 4~6세기까지 올라간다. 이곳을 거쳐간 4개의 각기 다른 문화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 유적의 남쪽에는 광장이 있다. 광장 앞에는 인간의 유골과 토기 등 15세기 제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실물크기의 '취한 사람들'이라는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들도 제사 지낼 때 인신공양으로 희생되던 모습이었을 것 같다.

이 유적은 버려져 있었다. 후에 사람들은 그 위에 흙과 벽돌로 각층을 덮어 거대한 동산을 만들고 성당을 세웠다. 이렇게 형성된 문화를 흔히들 멕시코 문명과 스페인 문화의 융합이라고들 소개한다. 그러나 멕시코의 장엄한 고대 유적을 깔고 고깔처럼 앉아 있는 성당을 지은 현재의 모습만이 눈에 남아 있다. 이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도 낯설었는지 이곳에는 수없이 전해오는 여러 말들이 있다.

아스떼까인의 최고신은 '껫살꼬아뜰'이다. 그런데 이 껫살꼬아뜰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깃털이 있는 뱀으로 상징되고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서기 700년 경에 예언자로 현신하여 그들 가운데 나타났다. 이 예언자는 촐룰라 지방에 나타나서 그들에게 개화된 문명 지식을 가르쳤다. 예언자는 또한 이교도 신앙과 혼합된 형태의 이상한 의식을 전파했는데, 그것은 가톨릭 교의와 매우 유사했다고 한다. 이 지역인이 전설적인 그 스승에게서 배운 의식은 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특별히 이 장소에 이러한 모습의 유적이 쉽게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촐룰라는 현지인의 언어로 '피신하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종교적 신성 지역으로 여겨지던 촐룰라는 스페인 정복 당시 무역의 교차로이며 문화의 중심도시였다. 그러나 1519년 스페인 출신 정복자인 꼬르떼스에 의해 크게 파괴당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꼬르떼스는 이 도시에 도착해서는 엄청난 수의 탑과 신전을 보고 놀랐다 한다. 그 수는 400개나 되었다 한다.

그 후 이 지역이 정복된 다음 여기에는 하루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미사를 바칠 수 있도록 365개의 성당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도시에는 39개의 교회만이 있으니, 이 전설은 과장일 수 있겠다. 어찌되었던 촐룰라는 예나 지금이나 신전이든지 교회를 왕관처럼 쓰고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자락에 형성되어 있다.

현재 멕시코에는 성당이 무척 많다. 어느 마을이건 간에 가장 눈에 띄고 잘 지은 건축물은 성당이다. 성당을 행정단위마다 짓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은 성당이다. 아마도 멕시코인들은 자신의 집보다는 성당짓는 데 더 충실했던 듯하다. 버스에서 혹시 졸다가 문뜩 눈뜨면 언제나 성당이 보이곤 하는 나라이다.

멕시코는 여러 고대 문명이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파멸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각각의 문명은 스페인어와 가톨릭이라는 두 요소와 혼합되어 오늘의 멕시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멕시코의 천주교는 토착화된 신앙으로 유명하다. 멕시코가 스페인에게 정복당한지 10년 후,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 절망에 빠져들던 인디오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1531년 12월 9일, 새벽미사에 다녀오던 후안 디에고는 인디오들의 도난트 여신의 신전이 있던 테페작 언덕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 그러나 당시 세상이 이를 믿지 않자, 성모는 디에고의 망또에 자신의 모습을 새겨주었다. 키 145㎝, 황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디언 처녀처럼 생긴 이 성모 마리아는 이렇게 인디오에게 자신을 드러냈고, 인디오들을 감싸 안았다. 이 이후 인디오들은 8년만에 900만 명이나 세례를 받았다. 이 숫자는 당시 멕시코 인구의 거의 전부에 해당된다. 이렇게 천주교와 인디오 문화가 융합되어 갔다.

그러나 토착, 융합 등의 단어가 이 유적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가? 되돌아오는 길에 유적의 전체 배경을 카메라에 잡기 위해 버스 안이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 말고 또 다른 동요가 있었다. 동료교수들이 토착문명을 짓밟고 선 멕시코 천주교의 행태를 안타까워하며 한탄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를 부여하는 우리는, 옛 문명 위에 덧씌워진 새 문명의 이상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멕시코 전 유적을 보면서 애잔한 서러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 유적은 특히 그랬다.

마야 유적의 기둥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당을 지은 미뜰라, 아스떼까 신전을 흙 속에 깔아 버리고 선 현재 멕시코 수도의 중심부 소깔로 광장 등까지 합세하여 종교가 할 수 있는 참된 일이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동산 위에 흰 성당이 덜렁 앉아 있는 촐룰라 유적은 풀기 어려운 질문을 우리에게 안긴다.

글:김정숙(영남대교수) 사진:최종만(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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