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56세에 수능 친 이판연씨

아들 딸 셋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킨 중년 주부 이판연(56)씨는 올해 대학 입학 수능시험을 치렀다. 아침밥과 뜨거운 물을 챙겨줄 어머니도 없었고 고사장까지 태워 줄 아버지도 없었다. 물론 고사장 입구에 응원 나온 후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벌써 사회인이 된 막내딸만이 '엄마 시험 잘 쳐'하고 대문 앞에서 가볍게 격려해 주었을 뿐이다.

이판연씨는 지난 계명대학교 어문학부 수시 모집에 이미 합격한 수험생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을 분명히 알고 싶었다. 운이 좋아 수시 모집에 합격한 것이 아니란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판연씨의 최종학력은 고등학교 입학이 전부. 학업을 중단한 것은 약 40년 전. 고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한 달쯤 학교엘 다녔지만 결국 쫓겨났다. 가난했던 가정형편 탓에 입학금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향인 성주군에서는 '천재'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총명했던 그였다.

이씨는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지난 40년 동안 단 하루도 배우지 못한 설움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들 딸 셋을 키우는 내내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맡았고 비교적 높은 학력의 어머니와 선생님들을 상대하는 동안 그 설움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학교 공부를 천편일률적이네 암기위주네 말들이 많지만 배운 사람은 다르더군요. 한창 수다를 떨다가도 어느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씨는 '오늘 큰 결심하고 나왔다'는 듯 묻어둔 사연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씨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고등학교를 마친 줄 알고 있다.

"명문 여고 졸업했다고 늘 거짓말해야만 했어요.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있었고요". 한번 던진 거짓말이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고, 언제부터인가 그녀 앞에는 명문 여고 출신이라는 딱지가 흉터처럼 굳어졌다. 거짓말을 늘어놓은 자신이 미워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판연씨가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지난 99년 8월. 뒤늦게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다니던 친구의 권유에 용기를 얻었다. 그날 바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고 결국 대입 수능시험까지 치르게 됐다.

중년 주부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수능 준비를 핑계삼아 아내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다. 골목에서 만난 이웃과 수다도 떨어야하고 동네 아줌마들의 자잘한 일상에 끼어들어 '밤 놔라 대추 놔라' 참견도 해야 한다. 유난히 문제가 어려웠다는 올해 대입 수능시험, 그러나 이씨는 자신만만하게도 별로 어렵지 않더라고 말한다. 모나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세상을 대할 줄 아는 중년 아줌마의 느긋함에다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그녀의 '천재성'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늘 이씨를 괴롭힌 것은 등록금이었다. 생각해보면 대학에 합격한다고 해도 별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결국 포기라는 악몽이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큰아들도 두 번이나 휴학시킨 끝에 겨우 마치게 한 대학공부였다. 그러나 이씨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커다란 원군이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오래 된 친구들.

뒤늦은 이씨의 대입 준비를 기뻐한 친구들이 흔쾌히 등록금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함께.

수시 모집에 합격한 이씨는 봄이 오면 대학생이 될 것이다. 처음 수시 모집 합격 통보를 받던 날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몇 번씩 인터넷을 통해 확인했지만 금방이라도 누군가 '장난이었어'라며 비웃을 줄 알았다. 합격 통지서를 받은 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누구인지 모를 대상에게 감사하고 있다. 40년간 품어온 한을 풀어준 세상의 모든 대상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이씨는 영어영문학이나 중어중문학을 전공할 작정이다. 능숙하게 외국어를 구사해 통역 일을 해보고 싶다. 이씨는 어쩌면 두 가지 언어에 모두 매달릴는지도 모른다는 욕심까지 내비쳤다. 이판연씨는 친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멋있는 대학생이 되겠다고 다짐하듯 되뇌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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