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할아버지 합창단 은빛메아리

33인의 합창단 '은빛 메아리'(단장 천시권, 전 경북대 총장)는 할아버지 합창단이다. 대구.경북 거주 60세 이상의 할아버지들이 다수이지만 단원 중에는 고희(70세)를 훌쩍 넘긴 할아버지들이 많다. 단원들 대부분은 중고등학교 교장, 대학 교수, 또는 공무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분히 끝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구시민들이라면 한두 번쯤은 이름을 들어 본 일이 있거나 낯이 익었을 할아버지들이다. 단원 중에는 현직 구청장도 있다.

'은빛 메아리'는 음악을 사랑하고, 대구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할아버지들의 모임이다. 1999년 9월, 24명으로 창단한 이래 35명까지 회원이 늘었지만 2명은 지난 해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들은 매주 한차례씩 함께 연습하며 우의를 다진다. 뜻을 같이 하는 할아버지들을 위해 합창단의 문은 언제나 열어 두었다.

'은빛 메아리'의 할아버지들은 지금까지 4차례의 공연을 가졌다. 공연은 정기적인 행사가 아니며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대구 시립 소년소녀 합창단 정기 연주회' 찬조출연, '20세기 대구 음악회고 콘서트' 찬조 출연 등 사랑하는 이 땅의 손자손녀, 아들딸들과 함께 부르기 위해 노래했을 뿐이다.

'은빛 메아리'의 노래는 할아버지들의 목소리에 어울리게 작곡했거나 편곡한 노래들이다. 작곡과 편곡은 대부분 이 합창단의 지휘자인 라경관 할아버지(대구 사회 문화대학 명예교수)와 임우상 할아버지(전 계명대 음악대학장)가 맡았다. '달이 밝느냐 달이 밝느냐'로 시작되는 '낙동강 처녀', '청산에 살리라' '닐니리야' '희망의 나라로' 등 감미롭고 도 힘찬 노래들이다. '들장미' '종달새' '메기의 추억' 등 중고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불렀던 노래도 빼놓지 않는다.

합창단 '은빛 메아리' 단원들은 '음악사랑'이라는 고질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평생을 일해오는 동안 음악인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인 셈이다. 흔히 일상에 묻혀 산다는 것은 부드러운 살점을 발라내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지난(至難)한 인생을 사는 동안 사람들은 추억을 잊고,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잊고, 오래 전에 보았던 고향집을 잊은 채 앙상한 뼈마디로 견디며 사는 것이다.합창단 '은빛 메아리'의 할아버지들은 이 건조하고 못마땅한 정렬에 노래의 리듬을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무심코 할아버지들을 '은빛 메아리 합창단'이라고 부르지만 할아버지들은 '합창단 은빛 메아리'라며 이름을 분명하게 고쳐준다. '합창단 은빛 메아리'의 작은 노래는 '봉사단 은빛 메아리', '위문단 은빛 메아리', '장학회 은빛 메아리'로 또 '후원회 은빛 메아리'로 세상에 메아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은빛 메아리' 할아버지들이 합창단을 맨 먼저 만든 데는 노래를 사랑한다는 이유 외에 몇 가지 특별한 목적이 있다. 합창은 여러 사람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불협화음의 완전한 부재, 한 목소리, 한 마음, 하나됨을 위한 노래…. 그래야만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억만년을 이어 살아갈 터전을 지켜내려는 할아버지들의 바람이 멀리 메아리쳐 갈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일을 그만 둔 것이 아니라 후진에게 물려주었을 뿐입니다. 가정과 사회의 도덕성을 확립하는 일,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기풍을 진작시키는 일…. 노인들이 해야할 일은 얼마든지 남아 있습니다". 두꺼운 안경과 눈내린 듯 백발을 얹은 할아버지들이 노래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혼자 생각하기 좋아하는, 그래서 다소간 '제 멋대로'인 이 땅의 아들딸, 손자손녀들에게 할아버지들은 '그러지 말고 함께 살자꾸나'라는 말을 노래로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오랜 세월 몸에 밴 절제와 기품, 기분 좋은 할아버지들이란 말 외에 달리 마땅한 수식어를 찾기 힘든 사람들. 합창단 '은빛 메아리'의 노래는 패기에 찬 젊은 눈이 미치지 못하는 세상의 후미진 곳까지 울려 퍼질 것이 틀림없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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