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통마을을 찾아서-안동 풍산 소산마을

고려태사 김선평의 후예들인 안동김씨의 본산 안동시 풍산읍 소산마을. 학가산자락이 남으로 뻗어내려 그 지맥이 마을을 감싸 안아 소산이라 했다. 마을 앞은 기름진 풍산평야가 자리잡고 있다.

김태사의 후손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조선초 비안(比安)현감을 지낸 김혁에서 비롯된다. 김혁은 실제 이 마을 입향조인 김삼근의 아버지로 지금의 안동 남선면 정상리에서 살다 풍산읍 하리로, 다시 소산마을로 옮겨 정착했다.

이때부터 500여년간 안동김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도승지와 대사간을 지낸 계행(係行), 세조의 국사였던 학조대사(學祖大師), 사헌부 감찰 영전(永銓) 등 숱한 학자와 정치인들이 났다.

이후 이 마을 안동김씨들은 안동 길안면 묵계리와 서울 등지로 분파돼 갔으며 그 중에서도 조선후기 명성을 떨쳤던 서울 장동파에는 문정공 김상헌과 형제가 함께 영의정을 지낸 그의 아들 수홍, 수항 형제 등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 6명의 대제학, 3명의 왕비가 배출 됐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분분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조선 인조때 예조판서였던 문정공 김상헌선생이 병자호란때 임금의 굴욕적인 화친을 반대하다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읊었던 노래다.

공은 그길로 심양으로 가 모진 고초를 겪었으나 굴하지 않고 조선선비의 기개를 보이자 그의 충절에 감동한 청조가 3년만에(인조 23년) 볼모를 풀고 고국으로 돌려 보냈다.

이후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해 칩거하면서도 굴욕적 외교에 대한 울분을 토했고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집의 현판을 청원루(淸遠樓.경북도 유형문화재 199호)라 지어 심경을 달랬다. 청원루는 서울 장동파의 종택이다.

또 이마을에는 안동김씨 대종가로 문중 번성의 싹을 틔운 정렬공 구택인 양소당(養素堂)과 입향조 삼근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낙향은거하며 지었다는 돈소당(敦素堂), 동야고택, 태고정, 정려문, 역동제사 등 많은 문화재들이 보존돼 있다.

아직도 100여호 가까운 안동김씨 후손들이 살며 매년 명절이면 전국의 문중 후손들이 모여 함께 묘사를 올리는 등 유가의 전통을 실천하고 있다.

안동.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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