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세상은 각기 다른 영화가 동시 상영되는 메가플렉스(복합영화관)일까. 빛과 어둠, 환희와 비애, 삶과 죽음이 엇갈리기도 하고, 생의 열정이 들끓는 곳이 있나하면 가난과 고독이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구르는 곳도 있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같은 사람이 있나하면 인생을 낭비하는 현장들도 있다.
신설 르포 '현장파일 이곳'은 우리가 쉬 가볼 수 없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그곳'과 '그곳 사람들'의 하루를 밀착 취재, 살냄새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4일 아침 6시20분. 쪽방 50여 개가 밀집된 대구시 북구 칠성동 꽃시장 부근의 좁은 골목길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짙은 어둠이 안개처럼 스멀거리는 골목길에서 하나 둘 사람들이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대로쪽으로 사라진다. 더러는 약속된 일자리가 있는 듯 가벼운 걸음도 있지만 대개는 하루를 운에 맡긴 채 무작정 방을 나선 듯 하다. 하릴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간 쪽방에서조차 쫓겨나 노숙자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쪽방촌엔 일감을 찾아 큰길로 나서는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더 많다. 아파트 청약률이 치솟고 건축경기가 활기를 되찾고 있다지만 쪽방사람들에겐 공사장의 일자리 구하는 일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쪽방 사람'. 이 단순한 말속에 앵벌이, 무의탁 노인, 전과자, 중증장애인, 주정꾼 같은 불성실하기 짝이 없는 온갖 수식어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서둘러 골목을 나선 이들 중 몇몇은 일감을 찾지 못해 이른 아침부터 휘청휘청 술에 취하기 일쑤다. 또 몇몇은 비좁고 냄새나는 방으로 되돌아와 종일 라디오에 귀기울이거나 무료 급식 시간이 될 때까지 낮잠을 청한다. 20년 가까이 이 집을 지켜온 주인 여자의 말이다.
오후 2시, 쪽방에 남았던 몇몇 사람들마저 무료 급식소를 찾아 어딘가로 떠난 텅 빈 골목. 비좁은 골목길에서는 하늘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골목을 타고 질질 흐르는 생활하수, 퀴퀴한 오물냄새와 눅눅한 습기. 여름이라면 잠시도 견디기 힘들만큼 지독한 냄새다.
오래 전에 사람들이 죄다 떠나버린 것 같은, 피란촌 같은 골목과 낡은 집. 그러나 그 비좁고 위태한 방마다 어김없이 누군가의 남루한 옷가지와 이불이 주검처럼 널브러져 있다. 이불 위의 냄비, 냄비 위의 이불, 방바닥엔 이불과 밥그릇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 뒹군다. 한 사람이 겨우 비켜갈만한 좁아터진 복도엔 빈 술병과 쓰레기가 가득하다. 창문 없는 방문, 뚫린 창틀로 쉴새없이 밀려드는 초겨울 바람, 떨어지다만 벽지는 겨울 논바닥의 폐비닐처럼 너덜거린다. 생채기처럼 드러난 벽돌은 사람의 부드러운 살을 노리는 흉기로 변해 있다. 천장이 없어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방, 그래서 유난히 천장이 휑한 방, 그 속에 백발의 한 노인이 누워 있다. 노인은 기자가 건네는 한 개비의 담배가 꽤나 오래간만이었는지 몇차례나 감사를 표시한뒤 연기를 깊이 빨아 들였다. 깜빡 잠이 든 바람에 점심도 굶었다는 노인은 "종이박스라도 주워 팔아야 한다"며 느린 걸음으로 방을 나선다. 깊은 주름, 쇠약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이제 54세였다. 쪽방너머 세계의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이곳 사람들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게으름'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기자의 눈으로도 대부분의 쪽방 사람들에게서 '근면의 미덕'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장씨라고 자신을 소개한 40대의 남자는 자신은 단 한번도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 자신도 누군가를 존경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무섭고 냉정한 세상에 철저하게 주눅들어있고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저녁 8시, 이미 거나하게 취한 장씨는 '딱 한 병만!'이라며 또 한 병의 소주를 요구했다. 감기를 1년 내내 달고 산다는 그는 제맘대로 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같기도 하다.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웃는다. 그 웃음과 분개에 어떤 이유나 설명을 붙이기는 힘들었다.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변방의 인생들. 쪽방사람들에게 사회로의 완전한 편입은 매우 힘들 것 처럼 보인다. 무학, 무전(無錢), 질병, 게으름, 체질화된 무위도식…. 어쩌면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소외지대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이들과의 공존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달랑 1장 남은 달력, 찬 바람에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쪽방동네 사람들에게 겨울준비란 사치스런 단어다. 그들에겐 그저 이 겨울을 버텨내야 겠다고 마음먹는 것 외에 달리 준비하고 말 것도 없다. 암울한 공기가 납덩이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곳. 하지만 절망이 있는 곳에 또한 희망도 있는 것 아닐까. '덜커덕 덜커덕'…. 12월의 바람이 쪽방문을 치는 소리와 함께 쪽방 골목의 밤은 점점 깊어간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쪽방이란?: 무허가 판자촌, 산동네, 지하셋방 등과 혼용돼 애매한 부분이 많다. 한국도시연구소는 △한사람이 잘 수 있는 작은 방 △화장실이나 부엌이 딸리지 않은 방 △거주자는 불안정하고 이동성이 강한 직업을 가졌고 △소득이 낮고 가족을 구성한 경험이 적음 △보증금 없는 월세(월 11만-12만원)나 일세(4천~7천원)로 거주하는 경우로 정의한다.
◆대구의 쪽방:약 1천여 개에 거주자는 800~900명으로 추정되나 이동성이 강해 정확한 통계자료를 얻기 어렵다. 주로 역, 인력시장, 버스정류장, 사창가 주변 등에 분포돼 있다. 여인숙, 하숙방 형태이며 수리나 개축없이 처음 지어진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난방은 대부분 연탄 보일러에서 기름 보일러로 바뀌었다.
◆거주자의 일반적 사항:주로 40~50대의 남성이며,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 남자가 86%, 여성이 14%를 차지한다. 41%는 결혼한 적이 없고 나머지 사람들도 이혼 21%, 사별 15% 등으로 사실상 가족해체 상태에 있다. 일용직 노동이 56%로 가장 많고 무직 20%, 노점 10%, 폐품수집 7% 순이다.
(자료 제공:대구 쪽방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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