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망대-주보돈 경북대 박물관장-한국인의 문화의식

한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였다. 정말 큰 것보다는 작고 아담한 것이 좋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무조건 큰 것을 좋다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경제개발의 기치 아래 건설사업이 한창이던 3공화국 어느 시기 이후 새로운 큰 건축물을 축조할 때마다 동양 최대니 동양 최고니 어쩌니 하면서 떠들어대곤 하였던 데에서 비롯된 입버릇이 아니었던가싶다.

다 아는 바처럼 그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당시 위정자의 치적을 과시하려는 시대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후 그것이 마치 체질화된 느낌이다. 큰 것을 무조건 내세우는 마음속에는 언제나 허위의식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주머니 속의 송곳은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실체가 저절로 드러난다.

아마도 '동양에서 어쩌니' 하던 시절은 거꾸로 우리의 현실이 전혀 그렇지 못한 사실의 반증이리라. 한때 갑자기 우리 상고사에서 중국을 능가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거대제국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주장하는 이른바 재야사학이 대중적 인기를 얻어 급속하게 확산된 적이 있었다. 이것도 바로 그런 허위의식이 난무하던 시대적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가 않다. 아직도 그런 잔재들이 곳곳에 남아 꿈틀거리고 있다.

몇 년 전 한국을 잘 안다는 어느 일본인이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란 긴 제목의 책을 간행하여 잠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저자는 나름대로 힘을 쏟아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비판하였는데 정말 여러모로 귀담아 새겨들어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는 대목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아직 맞아 죽었다는 소문은 물론이고 맞았다는 이야기조차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제목에서 풍기듯이 그렇게 엄청나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내용은 아니었던 듯싶다.

그런데 그 가운데 우리의 과장적인 의식을 꼬집는 장면은 특히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었다. 저자는 구체적인 사례의 하나로 63빌딩과 관련한 경험담을 손꼽고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63빌딩이 당연히 63층일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당초 저자 자신도 으레 63층일 것으로 생각하여 엘리베이트를 탔으나 60층까지밖에 표시가 되어 있지 않자 이상스럽게 여기면서 그곳에 내려 63층으로 걸어 올라가기 위해 통로를 찾았지만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물어본 즉 60층이 마지막 층이라고 하더란다. 그렇다면 왜 하필 63빌딩이라고 하였는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지하 3층을 합하여 그렇게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미 일본(?)에 62층의 빌딩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 높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그렇게 억지로 갖다붙인 것이라 풀이하면서 한국인의 과대 포장하는 의식구조를 비판하였다.

사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애교로 보아 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의도적이고 또 체질화되어 있을 때 문제가 된다. 이 부분을 읽고 마치 우리의 숨겨야 할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 정말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처럼 큰 것을 과시하려는 풍조 속에도 유독 스스로를 낮추어 평가하려는 분야가 있다. 우리의 자연과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의 것을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조건 볼 것이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낮추어 보려 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외국의 것은 무슨 대단한 내용과 규모가 있는 듯이 착각하면서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외국 어디를 다녀 보아도 그 자연이나 문화가 우리 것보다 특별히 낫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다만 선진국 사람들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자신들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우리와 비교할 때 두드러지게 차이가 날 따름이다. 현실을 실상보다 지나치게 과시하려 하면서 정작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낮추어 보려는 의식은 무엇인가 거꾸로 된 느낌이다.

그래서 칼날 같은 독설로 정평이 나 있는 필자의 어느 동료가 지적하는 말이 평소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문화적으로 볼 때 일본인의 조상들은 못났지만 후손을 잘 만나 크게 평가를 받는 반면 한국인의 조상은 뛰어나지만 못난 후손을 두어 한심스럽게도 평가절하 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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