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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표류하는 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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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드러내는 표현 작용은 자신과 타인의 의미와 존재 조건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표현하는 것만이 반드시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현을 억제하고 감추는 것이 존재의 참다운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인간의 외적 가치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가치가 낮게 평가되고 내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몸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소인배의 삶의 양식이었다.

그러므로 사내가 쉽게 우는 것도, 처녀가 요란스럽게 웃는 것도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그저 안으로 삼키고 감추는 것이 미덕이었다.

표현은 이미 내면적 가치라는 의미 체계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몸의 표현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과도한 금욕주의적 삶의 형태는 도덕적 권위주의를 낳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대인은 금욕주의의 불행 속에 자기를 예속시킬 수 없었다.

내면적 가치라는 의미 체계에 묶여 있는 자신을 풀어내기 위하여 자신의 몸과 관련된 제반 활동을 긍정적으로 자리 매김 하고자 하였다.

사실 서구 근대 시민혁명에는 단순한 해방에 대한 몸부림의 차원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살풀이가 전개되었다.

그래서 아렌트(H. Arendt)도 프랑스 혁명은 이미 또 하나의 부르주아 억압 구조를 재창출하였다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표현과 억압'의 갈등과 대립 구조는 인간의 삶 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이런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 같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

부모는 전근대적인 의미 체계에 가치를 두고 자식의 표현을 무례함으로, 남편은 아내의 표현을 부인답지 못한 행동으로 바라보며, 역으로 자식과 아내는 부모와 남편을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가정은 이로 인하여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으며, 거리의 아이들이 증대하고 있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도 안 된다는 의미 중심의 삶을 그리워하고 있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한다.

이로 인하여 학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분열의 골이 깊어 가고 있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중심부는 주변부의 표현을 무모함으로, 주변부는 중심부의 의미 구조를 권위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사회 집단간의 대립은 심화되고 있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통수권자와 국민 사이에 의미와 표현의 불일치가 심화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의미 구조와 표현 작용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정보화 사회와 사이버 시대의 도래는 표현의 무모함에 제동을 걸기가 어려운 정도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는 표현의 놀이는 한편에서는 공론장의 활성화라는 긍정적 기능도 수행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타자를 파괴하는 쾌감 속에서 진행되는 배설 작용의 기능을 양산하고 있다.

표현 매체인 대중 매체들은 모두 이런 분위기를 상업화하여 자본 획득을 위한 전략적 기제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처럼 표현의 물결이 정신없이 출렁이고 있다.

자신들의 표현이 담고 있어야 할 의미 체계에 대한 고민이나, 자신들의 의미 체계가 펼쳐 나갈 표현의 물결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표현과 의미 체계가 겉도는 존재 상실의 시대를 겪고 있다.

표현의 과도함도 의미의 무거움도 분명 삶을 가치 있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처럼 존재의 가벼움을 유발하는 표현의 무의미성도 반성되어야 할 것이며, 과거처럼 존재의 무거움을 유발하는 표현의 구속성도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21세기 우리가 살아가야 할 문화는 의미의 물결과 표현의 물결이 상호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공론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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