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금요일 늦은 밤, 그는 이미 셔터가 내려진 상점이 많은 거리를 걸어 퇴근한다.
바람은 그 계절 들어 처음인 듯 차갑고 세차다.
옷깃을 여미다 문득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니 나무가 정말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공중에 뜬 생선가시 모양 새하얗게 서 있다.
그리고 자동차마저 한적한 길 바닥엔 마른 가랑잎들이 몸을 뭉쳐 서로의 빈곳을 채우거나 통과하고 있다.
그는 중얼거린다.
이 도시가 골목의 낙엽을 쓸지 않는 것은 정말 잘하는 거야
그는 얼마 전 작은 출판사를 냈다.
작가가 되리라는 꿈을 접은 것이다.
대신 그는 좋은 책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꿈에 사로잡혀있는 중이다.
요 며칠 동안 그는 이 도시보다 조금 작은 도시 어느 문학단체의 책을 만들고 있다.
그 곳에 사는 친구가 주선한 것이다.
그는 춥고 늦은 밤이지만 걸어가면서 조금 전까지 고민했던 일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그로서는 좋은 책을 출판하는 편집자의 자세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새 원고를 접할 때마다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개성, 그리고 새로운 형태에 스스로를 적응시켜야한다는 것도 깊이 새기고 있다.
대담한 상상력과 깊은 직관력, 저작 형식에 대한 적격한 센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에 대한 넓고도 깊은 지식을 갖추어야겠다고 늘 다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신문을 대여섯 가지나 보고, 틈만 나면 독서를 하고, 영화관이나 미술 전람회장을 찾는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 정도로는 작가들이 온 몸을 짜내, 그야말로 자신의 피로 쓴 듯한 작품들을 책으로 만드는 일에는 턱도 없는 일이라고 그는 또 생각한다.
그러다가 조금 전까지 만들다 내팽개쳐 두고 온 새로운 책의 표지를 떠올린다.
처음 만드는 책이므로 잘 만들어야겠다는 압박감에, 턱없이 현란해진 책을 바라보며 계속 한숨만 쉬다 나온 것이다.
물론 그는 작가를 꿈꾸던 여러 해를 다른 출판사에서 편집 담당으로 근무를 했었다.
새삼 기껏 몇 년 편집 밥을 먹었다고 출판사를 차리느냐던 선배의 질책이 가슴에 새겨진다.
그는 시간을 쪼개어 일러스트레이션과 표지 디자인 공부를 다시 한 번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내온 원고는 다양했다.
주로 산문과 시였지만 그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그것들을 읽었다.
그것은 교정과 비문을 가려내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글을 쓴 작가들과 교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원고를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와 정신을 읽고 싶었고, 혼자만의 느낌으로 그들의 앞날을 예측해보기도 했다.
또 꽃에 대해 쓴 산문을 읽을 땐 식물도감을 뒤적이기도 했다.
처음 들어본 꽃의 이름은 루드베키아였다.
때때로 그는 말수가 적고 겸손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아이디어에 민감하면서도 고집스럽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정직했고 외모 또한 단정한 편에 속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깊이 믿는 듯했다.
그것은 결코 그가 속이 없거나, 실없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완전히 새로운 실체로 읽고 있는 것에 은연 중 행복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무능하고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한 권의 책이 완성될 때까지 수없이 불안해하며 인쇄소와 제본소를 쫓아 다녔다.
그곳에서 각 방면 기술자들의 손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완성된 책에서 가장 먼저 오자와 탈자를 찾아내는 것도 그였고, 그것 때문에 속앓이를 하며 며칠 밤을 새곤 하는 것도 그였다.
집이 가까워와도 바람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부산하게 택시를 잡고 있다.
어디선가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바그다드의 한 호텔이 폭격당했다는 뉴스가 거리에 울린다.
바람이 이젠 옷을 뚫고 들어와 침까지 마르게 한다.
앞으로 작가들의 책을 만드는 그의 일도 그러하리라. 날마다 바람 세찬 길을 걷듯 이렇게 숨가쁠 것이다.
저 텔레비젼 뉴스처럼 단 한 번의 출판도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그에게 없으리란 예감을 하며 그는 집을 향해 걷는다.
박미영(시인.대구세계문학제 준비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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