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26)-속리산 종주(2)

2.

산은 낙목공산 (落木空山), 낙목한천(落木寒天). 산도 침묵 수행중, 모든 생물도 침묵 수행중이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산야를 오로지 눈만이 살포시 뒤덮고 있다. 이번 산행은 '눈 산행'이 되겠구만. '겨울 산행'의 백미는 역시 '눈 산행'이죠. 아, 너무 좋아라.

눈에 대한 말씀 세가지 소개. 1) 캘리포티아 공과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인 케네스 리브레히트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성한 문자"라고 표현했죠. 2)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현미경이 없던 시절에도 어찌나 이를 뚫어져라 분석했는지 "6개의 이빨이 달린 자그마한 장미가 떨어진다"면서 "그것들은 투명하고 아주 납작했으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3) 그러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별이나 눈송이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해서 그 신비가 훼손당하지는 않는다"고 목청을 돋구었죠. 데카르트의 분석을 바로 맞받아쳤구만. 맞습니다. 진실은 예술이나 과학의 상상 너머에 있는거죠.

비와 눈의 합작품이 뭔 줄 아세요. 진눈깨비에요. 진눈깨비의 끝자가 비니까 결국 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눈의 일종이 아니까요. 일반 눈송이는 대기를 떠도는 수증기가 곧장 얼음으로 변할 때 생기는 것인데 비해 진눈깨비는 빗방울이 얼어붙어서 생긴 것 이라고 하네요. 그렇구나.

결론이 중요. 똑 같은 눈송이는 없다고 하네요. 똑같은 인간이 없고 똑 같은 나무가 없듯이. 이 우주 안에 똑 같은 것은 하나도 없구만. 똑똑하다, 이헌태. 그래서 우주 안의 만물은 존귀하다는 것이지.

나온 김에 눈에 대한 시 몇 편을 엮었습니다. 근시, 원시, 약시 그런 시가 아니고요. '눈 시 백화점' 이라고나 할까. 이 기회에 눈과 눈에 대한 시는 완전 마스터하세요. 무슨 대학입시학원같구만. 최고의 강사 이헌태.

둥둥둥. 한국의 시인들은 눈이 안 내렸으면 우짤 뻔 했노. 시인이라면 빠짐없이 다 눈 갖고 장난쳤더라구요. 뭐야. 찜했더라구요. 뭐야. 그만큼 눈이 감동적이라는 것이겠죠. 이헌태 생각대로 하면 눈 안 내리는 아프리카에는 시인도 없겠구만. 하여튼 눈에 대한 시를 겁나게, 눈 튀어나오게 많이 모았습니다. 눈 튀어나오게도 눈이네.

윤동주의 '눈'. "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 지붕이랑 / 길이랑 밭이랑 / 추워 한다고 /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 그러기에 /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나 원 참, 눈이 이불이라구. 이 시를 지은 사람이 윤동주 맞습니까. 저는 유치원생이 쓴 동시인줄 알았거든요. 너무 '유치찬란' 한 것 같아서요. 동심이 잔뜩 묻어나서 좋다구요. 죄송했습니다.

김소월의 '눈'. " 새하얀 흰눈, 가비엽게 밟을 눈,/ 재가 타서 날릴 듯 꺼질 듯한 눈,/ 바람엔 흩어져도 불길에야 녹을 눈./ 계집의 마음. 님의 마음". 나풀거리는 눈을 계집의 마음에 비유하다니, 지금 같아서는 여성단체로부터 매장당할 시이구만.

다음은 김수영의 '눈'.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 /廢墟에 廢墟에 눈이 내릴까. 누가 그랬나 눈은 다 내리고 쓸어야 한다고. 그 전에 하면 '헛고생' 이라고.

박용래의 '눈'.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 눈이 뿌린다 /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묻혀있는 하루 하루 낡어가는 것 위에 / 눈이 뿌린다 /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限界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워지는/하얀 斷層". 이헌태의 희망 한마디. " 눈이 이 세상의 탐욕과 이기도 지워서 선과 악의 경계마저도 없애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온 시가 바로 강만의 '눈 숲'. "나지막한 숲에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은 내려와 숲 속의 것들을 하나씩 지워내기 시작했습니다. 지상의 빛깔들을 모두 지워낸 후에야 눈은 그치고 낮은 소리로 흐르던 물도 멈추었습니다. 마지막 남아 있던 새 몇 마리 날아가버리자 숲은 텅 비었습니다. 어떤 분의 옷깃으로 쓸어낸, 빛깔로 소리도 없는 성지였습니다. 그제야 하늘에서 영롱한 말씀들이 창세기의 언어로 숲 속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숲이 눈부셨습니다. 현란한 욕망의 색채들을 지워버리면 우리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벌판을 가로질러 신비한 말씀들을 듣기 위해 육신을 벗어버리고 숲으로 갔습니다"

섬뜩한 시도 있더라구요. 백색의 눈 위에 선연한 붉은 피 한방울. 김달진의 '눈'이죠. "하이얗게 쌓인 눈 우에/ 빨간 피 한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 속속드리 스미어 드는 마음이 보고 싶다"

보너스 하나, 박남수의 '눈'이죠. "눈은, 나의 視界를 온전히 흰빛으로 채운다./ 하얀 부정, 초원도 삼림도 그 푸름을 잃고, /지금은 평등하게 만상은 눈 속에 있다./ 삶도 죽음도 꼭같이 부정된 이 아침이 / 왜 이렇게 상쾌하냐. // 저 하얀 처녀지에 발을 딛고 싶지 않다. / 차라리 누군가가 걸어와 주었으면. / 천사같이 가부야운 사람이 걸어와 주었으면.// (아내여 땅속에도, 지금 눈이 내리는가. 눈이 내리어 온 저승이 하얗게 덮이었는가.)// 물어도 소용없는 세상에도 눈이 내렸으면.// 감은 누이 視界에도 하얀 부정. / 흙도 지하수도 그 빛깔을 잃고, 모두 평등하게 만상이 눈 속에 있었으면. / 삶도 죽음도 꼭같이 긍정되는 아침에 아내도 가슴 가득 상쾌했으면."

김삿갓의 '눈' 시도 있죠. "천황이 돌아가셨느냐 인황이 돌아가셨느냐. 오만 나무들과 청산들이 다 흰 상복을 입었네. 날이 밝아 태양이 문상을 오자 집집마다 처마끝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네" . 100점. 또 "송이 송이 날아오는 눈송이는 춘삼울 나비같고 밟을 적마다 눈 다져지는 소리는 유월달 개구리소리같구나". 80점.

나도 사대주의자인가. 소동파의 '눈'이 역시 가슴에 와닿는다. " 추운 밤 얼어붙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고 잠을 청하다가—배안으로 날아들어온 눈발은 솜털처럼 가볍다. 자세히 보면 꽃을 조각해 놓은 듯한 눈이 옷에 묻어있는데 / 하늘이 눈꽃송이 하나하나를 이렇게 조각해 만든걸까/ 순식간에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버렸는데 / 아, 이런 놀라운 능력은 누구의 손에 있는 것일까--- 춤추며 사방으로 마구 날아 떨어지는 눈송이 실컷 맞으며 / 재빨리 붓들어 이 광경 시로 읊네". 눈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축복이라는 말씀.

결론이 늘 중요. 국민 여러분. 흰 눈을 보면서 눈의 순수와 순결의 의미를 배웁시다. 세속의 티끌 조차도 깨끗이 정화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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